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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3년(게이쵸 8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이 대장군으로 임명되어 에도 막부를 열었습니다. 에도 막부는 무로마치 시대부터 이어져 온 전란의 세상에 끝을 알리고 265년에 걸친 장기 정권으로서 군림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기고 에도 막부 성립
1598년(게이쵸 3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도요토미 정권을 지지한 오대로의 필두 ‘도쿠가와 이에야스 ’는 천하 취입의 호기뿐 아니라 정치의 실권을 잡기 시작합니다.
도요토미 정권의 존속을 바라는 이시다 미츠나리(이시다 미츠나리) 등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충신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한 정권 탈취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토벌을 위해 거병하였다.
1600년(게이쵸 5년) 세키가하라의 싸움이 발발한다. 전국의 다이묘를 휘말린 대규모 합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꼼꼼한 책모에 의해 싸움은 반나절에 종결된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군배가 올라간다.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후 처리로서 도쿠가와파의 여러 다이묘는 이시다카 가증 등으로 후우하고, 적대한 제 다이묘는 감봉이나 개역(영지 몰수) 등에 의해 철저하게 배제했다.
그리고 1603년(게이쵸 8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정이 대장군의 선하를 받아 에도(현재의 도쿄)에 막부를 열고 에도 막부가 탄생했다.
막부의 중심을 에도로 한 것은 교토를 중심으로 한 조정으로부터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에도막부를 연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가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1614년(게이쵸 19년)~1615년(게이쵸 20년)의 오사카 겨울의진과 여름의 진에 의해 도요토미가를 멸망시켜 도쿠가와 막부의 권위를 확고하게 하였다.
다이묘 통제를 강화하고 막번 체제의 확립
에도 막부는 10,000석 이상을 부여받은 무사를 다이묘로 하고 다이묘가 관리하는 영지를 번 이라고 부르는 막번 체제를 깔았다.
다이묘는 도쿠가와가와 혈연관계에 있는 친번, 세키가하라의 싸움 이전부터 도쿠가와가를 섬기고 있어 마쿠마사의 요직에도 채용되는 보대, 세키가하라의 싸움 이후에 도쿠가와가를 섬기고 요직에 취할 수 없는 외양에 대별. 번의 수에 대해서는 증감은 있지만 평균적으로 300 정도였다.
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다이묘의 군사력을 제한하는 '일국 일성령'과 무가가 지켜야 할 의무를 정한 '무가 제법도 '를 잇따라 제정. 무가 제법도는 장군마다 개정되어 3대 장군 도쿠가와 이에미츠(토쿠가와이에미츠)는 다이묘는 1년마다 자국과 에도를 왕복해 장군에게 속견을 의무화하는 참근교대를 제도화했다.
에도에서 벗어난 땅을 받은 외양 다이묘에게 있어서 이 참근교대의 지출은 무거웠다. 게다가 에도성이나 성시 의 정비도 부과되었기 때문에 외양 다이묘의 경제 상황은 항상 좋지않았다고 한다.
정무를 통괄하는 노중이나 젊은이 정무를 감찰하는 대목부등의 직책은 친번과 악보 다이묘가 독점하였다. 또 조정을 감시하기 위해서 교토소 사대를 설치해 금중 병공가 제법도를 제정하는 등 천황이나 공가의 행동을 크게 제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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