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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통일 실현
텐쇼 10년(1582년) 6월 2일 천하 통일을 눈앞에 두고 오다 노부나가는 가신의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교토의 혼노지에서 살해되었다. 그런 노부나가의 적을 토벌한 것은 중신의 토요토미 히데요시였다.
히데요시는 오와리의 아시가루의 집에서 태어나 노부나가를 섬기고 두각을 나타내 중신이된 인물이다. 혼노지의 변의 때 중국 지방에서 모리 쪽의 다카마쓰 성을 수공으로 하고 있었지만 즉시 모리 씨와 강화해 돌려주고 혼노지의 변으로부터 불과 11일 후에 교토 교외 야마자키에서 미츠히데를 물리 쳤다(야마자키의 전투).
그 후 오다 가이치의 중신 시바타 카츠야를 가츠가다케의 싸움(1583년)에서 쓰러뜨리고 같은 해 이시야마 혼간지의 터에 오사카성의 축성을 시작해 노부나가의 후계인 것을 천하에 어필했다.
1585년에는 장종가부 전 부모를 내려 시코쿠도를 평정하였고, 같은 해 관백에 취임. 다음 해에 마사모토마치 천황으로부터 도요토미 성을 받고, 같은 해, 타이세이 대신(조정의 최고직)에 취했다.
이렇게 해서 조정의 위광을 배경으로 정권을 수립한 히데요시는 다이묘간의 사적 다툼을 금지하는 명령을 발하고, 1587년 이에 따르지 않았던 사츠마의 시마즈씨를 정토하고 규슈를 지배하게된다.
1590년 관동의 오다와라 호죠를 멸망시키고 토호쿠 지방의 여러 다이묘를 제압해 천하를 통일했다. 혼노지의 변으로부터 불과 8년 후였다.
검 사냥과 신분제도 확립
1588년 히데요시는 농민으로부터 무기(검, 활, 창, 철포)를 몰수한다. 이것을 칼 사냥이라고 한다. 당시 농민은 적의 습격에 대비하거나 병사로서 다이묘에게 밀려나기도 했기때문에 무기를 들고 있었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그들로부터 무기를 다루는 것으로 일준(무장봉기)을 막아 경작에 전념시키려 했던 것이다. 1591년 히데요시는 사람 소령(한장 예쁜)을 발포한다.
무사를 섬기는 무가봉공인(사무라이·소자 등)이 마을인이나 백성(농민)이 되는 것, 백성이 상업 활동을 하거나 임직에 나가는 것(즉 상인이나 장인이 되는 것) 등을 금지한 것이다.
이듬해 세키시로의 도요토미 히데지의 이름으로 다시 사람 소령(신분 통제령)이 발령되어, 무가 봉공인, 마을인(상인이나 장인), 백성 각각의 호수와 인원수를 전국적으로 조사해 확정했다.
이런 타이코 검지나 검 사냥, 사람 소령에 의해 직업에 근거하는 신분 제도가 정해져 신분의 이동은 할 수 없게 되었다. 또 무사와 상공업자는 도시(성시 등)에 거주하게 되어 마을은 농민만으로 구성되게 되었다. 따라서 이른바 병농분리가 확립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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