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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그는 누구인가?

투데이_시크릿 2023. 1. 18. 14:27

아프리카시대

 인도 서부 카티아와르 반도에 있던 소번왕국 폴 반달의 디원(재상)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4년간의 런던 유학에 의해 법정 변호사(바리스터)의 자격을 얻은 후 1891년에 인도에 귀착. 

 

1893년, 한 무슬림(이슬람교도) 상인의 소송 사건의 의뢰를 받아 남아프리카의 나탈에 건너서, 그의 인생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거치게 되었다. 

 

즉 거기에 일하는 인도인 연계 고용 노동자들의 시민권 획득을 위한 운동을 지도하게 되어, 22년간 여기에 체재해, 스스로 「사티야 그라하(진리의 파악)」라고 명명하는 대중적인 비폭력적 저항 투쟁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인 1915년 1월에 영국 경유로 인도로 돌아왔다. 이 남아프리카 시대에 쓰여진 '힌드 스와라지(인도의 자치)'(1909)라는 소책자에는 독자적인 인도 문명관, 농촌 수공업의 발전을 강조하는 인도 사회·경제론이 전개되고 있다.

 

비폭력적 저항

 귀국 직후는 정치가 고카레의 조언으로 인도내의 정치, 사회 상황의 관찰과 검토에 전념하지만, 1917년에는 비하르주 참팔란현에서의 인디고(아이) 재배 소작인의 쟁의,

 

다음 1918년에는 고향 구자라트, 아흐메다바드의 섬유공장 노동자들의 쟁의를 독특한 아힌서(비폭력)의 원칙을 관철해 해결했다. 아흐메다바드의 경우, 그 이후로 그가 자주 사용한 금식의 행이 처음으로 시도되었다.

 

그의 이름을 인도의 대중적 정치운동의 지도자로서 흔들리지 않는 것으로 하는 것은,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로라트법 반대, 쟈리안 워러버그(암리차르) 학살 사건 규탄, 무슬림의 킬러파트(터키의 칼리프제) 옹호를 요구하는 목소리 등을 배경으로 1919~1922년에 전개된 제1차 사티야 그라하(비폭력적 저항) 투쟁이었다. 

 

이어서 1930~1934년에는 영국 지배의 하나의 상징으로서 식염전매의 침범(이른바 '소금의 행진')으로 시작되는 제2차 사티야 그라하 투쟁을 지도하고, 이를 통해 농민대중을 포함한 인도의 모든 계급 , 계층의 사람들을 미조유의 규모로 반영 정치운동 속에 결집해 갔다.

 

또한 그는 이 과정에서 J. 네루를 선도하는 소수파의 진보적 그룹과 사르다르 퍼테일이나 R.프라사드 등 다수파의 보수 그룹을 국민회의파라는 조직 속에서 능숙하게 통합하고, 빌라 재벌로 대표되는 인도 민족 자본의 주류파를 끌어들이면서 국민회의파를 최대 대중적 민족운동조직으로 성장시켰다. 

 

다만 동시에 주의해야 할 것은, 바르도리 결의(1922)나 간디-어윈 협정(1931)에서 볼 수 있듯이, 스스로 이념으로 하는 아힌서의 원칙을 절대화하는 별로,

 

대중운동이 고양되어 그 내지 국민회의파 지도부의 지령의 틀 밖으로 발전하려고 하면 운동의 정지를 명하고 전체로서의 대중적 반제국주의 투쟁의 진전을 방해하게 된 점이다. 

 

그는 또한 노동자와 농민의 운동이 계급 투쟁적 색채를 띠는 것에 철저히 반대했다. 전술한 아흐메다바드에서의 노동쟁의 과정에서 그 자신이 지도하는 노사협조형 아흐메다바드 노동연맹(ALA)이 결성되지만,

 

이것은 그 후 국민회의파 주도 노동조합운동의 모델이 되어 독립 직전 1947년 5월에 발족한 인도 국민노동조합회의(INTUC)는 바로 이 노선상에 자리매김된 것일 뿐이었다.

 

사회 문제 해결

 간디는 또한 앞서 언급한 정치운동을 진행하는 가운데(혹은 그것이 정지된 시점에서) 인도의 직면하는 많은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예를 들어 1920년대부터 시작되는 모든 인도 방사공 연맹 설립에 의한 농촌 수공업의 발전, 1930년대부터의 불가촉민("할리장-신의 아들"과 그는 좋다) 해방의 운동, 힌두·무슬림 간의 통합, 신 교육(나이·탈림) 운동 등이 그래서 총칭해서 이들은 ‘건설적 프로그램’이라고 불렸다. 

 

이러한 운동 촉진을 위해 신문 '할리장'의 발행(1933년 2월)과 아흐메다바드의 서버르마티와 왈더에서 아슈람(도장)의 건설을 실시하고 있다.

 

무슬림 연맹의 지도자 M·A·진너와는 날카롭게 대립해, 그 파키스탄 건국론에 반대했지만, 결국 1947년 6월에 나온 마운트 배튼 재정에 담긴 인도의 분리 독립안을 국민회의파 지도 부가 승인하는 것을 억제할 수 없었다. 

 

독립 후 1948년 1월, 광신적 힌두주의자의 흉탄에 의해 쓰러졌다. '자전-진리의 실험'(1927~1929 출판)이라는 제목의 반생기는 시행착오 과정을 거치며 진리에 접근을 도모하려는 '마하트머'의 인간적인 모습을 잘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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