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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삼국시대 회의 화백, 제가, 정사암

투데이_시크릿 2022. 12. 3. 16:09

신라의 화백 회의

 

 신라는 삼국중 귀족의 권력이 가장 강했던 나라였으며, 강한 귀족들의 권력이 가장 오래 지속되었다. 그로인해 신라의 귀족회의인 '화백 회의'는 가장 체계적이었고, 오래 지속되었다. 화백 회의에서는 고구려, 백제의 귀족 회의처럼 귀족들이 모여 나라의 중요했던 왕위 계승, 전쟁에 관련된, 불교 수용 등 을 결정했다. 화백 회의는 신라의 4개의 신성한 곳으로 여겨지는 우지산, 피전, 금강산, 청송산을 돌아가면서 회의를 진했하였다. 

다른 나라와는 다르게 화백 회의는 귀족들의 의견이 반드시 만장일치가 되어야만 했다는 것이다. 어떤 안건에 대해 반대하는 귀족이 단 한명도 없이 모두가 찬성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굳이 이렇게 만장일치로 회의를 진행했던 이유는 화백 회의에 의한 결론에 좀 더 권위를 심어주기 위해서로 보인다.

하지만 만장일치가 되기 위해서는 항상 반대하는 의견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래서 귀족들간의 서로 다른 의견을 조정해주기 위해서 신라에는 '상대등'이라는 관직이 존재했다.

신라의 '상대등'과 고구려의 '대대로'는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른 관직이였으며, 신라의 1등급 관직이였다. '상대등'은 화백 희의의 의장을 도맡아 회의를 진행하였다. 

화백회의는 시기에 따라 운영상에 변화가 있기는 하였지만, 국왕의 일방적인 권력 행사를 견제하는 기능을 수행한 것은 시종일관 변하지 않았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화백회의는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이 독단할 수 없도록 견제하는 기능을 갖는 의회에 견줄 수 있고, 또한 거기에서 중요한 국사를 의논하고 결정하였기 때문에 오늘날 국무회의와도 견줄 수 있다. 따라서 화백회의는 왕조국가에서 국왕이 독단적으로 정책을 결정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을 효과적으로 방지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로서 기능하였다고 정리할 수 있다. 더구나 국왕과 재상들의 상호 견제와 균형을 기초로 하는 통일신라의 국정운영은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 행정부와 입법부의 상호 견제와 균형을 중시한 전통과 일맥상통하므로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것이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다양한 의견을 적절하게 수렴하는 원칙을 준수하였다는 측면에서 화백회의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가 구현된 사례로서 평가할 수 있다. 다만 신라의 화백회의에 부의 대표 또는 진골 귀족 다수가 참석하였기 때문에 법 앞에서 평등한 권리를 지닌 일반 민의 요구와 의사를 대변하는 오늘날의 의회와 달리 화백회의는 주로 6부의 지배층 또는 진골 귀족들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였다는 점에서 근대 이후에 성립된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제도와 차별되었다는 사실도 유념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화백 희의는 오직 성골 또는 진골 귀족만이 참여 할 수 있었으며, 6두품 이하는 참여할 수 없었다.

 

고구려의 제가 회의

 

 고구려는 5개 부족인 계루부, 순노부, 관보누, 소노부, 절노부의 연합으로 세워진 국가였다. 이들의 부족에서는 각각 '가' 라고 불리는 부족장들이 모여서 회의를 열어서 나랏일을 결정했다. 아 회의를 '제가 회의'라고 하며, 여기서 '제가'는 '가'들이 한군데 모인다는 뜻이다. 

제가 회의에서는 나랏일을 정하는것 말고도 다음 대의 왕을 누구로 정할지도 결정하였다. 고구려의 초기 왕들의 재위기간은 일정하지 않고 들쑥날쑥했으며, '고씨' 외에도 '해씨' 가 왕이 되기도 하였다. 여기서 볼 때 왕의 자리는 각 부족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가 된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런 위용을 자랑하던 제가 회의는 왕의 권력이 막강해짐에 따라 점점 힘이 약해졌다. 이때문에 왕과 귀족들이 종종 충돌하며 무력 싸움까지 발생하기도 하였는데, 이런 왕과 귀족들 사이를 조절하는 역할인 '대대로'라는 관직이 있었다. '대대로'는 고구려에서 가장 높은 관직으로 고구려의 1등급 관직이었다. 그런만큼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제가 회의를 통해 선출이 되었고, 3년이라는 임기를 가졌다. 오늘날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관직이다 

제가회의는 민주주의에서 행정부와 입법부의 상호 견제와 균형을 중시하는 전통이 고대에서 구현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고구려 후기에 귀족회의가 연개소문 단 한명에 의해 좌지우지되어 국력이 분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점은 오늘날의 민주주의 정치에 큰 시사점을 준다고 할 수 있다.

 

 

백제의 정사암 회의

 

 백제의 '정사암 회의는' 귀족들이 모여 국정을 논의하던 회의를 똣한다. 회의 명칭은 사비시대에 재상들이 '정사암'에 모여 국정 현안을 논의한 전통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정사암 회의는 백제에서 국정 운영 회의체가 발달하였음을 알려주며 우리나라 고유의 민주주의 전통으로서 널리 주목받고 있다. 

백제 또한 신라의 '상대등', 고구려의 '대대로' 처럼 '상좌평'이라는 고위 관직이 있었으며, 정사암 회의의 의장을 맡았다.

정사암회의, 즉 좌평회의는 백제사의 전개 과정에 따라 성격과 운영상에 변화가 있었지만, 국왕의 일방적 국정 운영을 견제하는 기능을 수반하였다는 점 자체는 백제의 시작부터 끝가지 변함이 없었다. 백제의 정사암회의는 행정, 입법, 사법의 삼권분립이 이루어진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행정부와 입법부 간 상호견제의 한 축을 담당하는 국회에 견줄 수 있다. 특히 정책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적하는 사례를 통해 오늘날 입법부의 행정부에 대한 청문회를 연상할 수 있으며, 회의 구성원들 간의 선거를 통해 의장을 선출하는 모습은 국회의장을 선출하는 오늘날의 국회 운영과도 비교해 볼 수 있다. 또한 거기에서 중요한 국사를 논의하여 의결하였다는 점에서 오늘날 행정부에서 이루어지는 국무회의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백제의 정사암 회의는 귀족들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는 점에서, 법 앞에 평등한 권리를 지닌 모든 시민들에 의해 선출되어 활동하는 오늘날의 국회와 분명히 차별된다는 점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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