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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미륵이 되고싶었던 궁예

투데이_시크릿 2022. 11. 29. 01:17

 895년(진성여왕 9년), 궁예는 동해를 끼고 북상해 영서 지방으로 넘어와 저족, 성주, 철원, 금성, 부약 등 10여 군현을 점령하여 세력 기틀을 다졌고, 지금의 강원도 전 지역을 장악한 궁예는 이듬해 철원을 자신의 도읍으로 삼았다. 궁예의 세력이 급격히 성장하자 패서, 즉 예성강 이북 지역의 호족들이 차례로 궁예에게 앞다투어 투항하였는데, 세력이 강력해진 것을 본 궁예는 나라를 세워 왕이 된다. 896년(진성여왕 10년) 송악의 해상 호족이었던 사찬 왕륭이 송악군을 바치고 항복한다. 이에 궁예는 왕륭을 금성태수에 임명하고 한편 왕륭의 건의를 받아들여 왕륭의 아들인 왕건을 송악군에 발어참성을 쌓게 한 뒤 그곳의 성주로 임명한다. 그 뒤로도 세력을 쉬지않고 확장하는 한편 897년(진성여왕 11년) 왕륭의 의견을 받아들인 궁예는 철원에서 송악으로 도읍을 옮기고, 왕건을 시켜 청주 양주 등 30여 성을 정벌하도록 하였다. 11월에 궁예는 처음으로 팔관회를 열었다. 899년(효공왕 3년) 청주 지방을 점령하여 소백산맥 이북의 한강 유역까지 수중에 넣은 궁예는 송악의 성을 중수한 뒤 이곳을 도읍으로 정하고, 3월에 왕건을 정기대감으로 삼아 견주와 양주를 공략하게 하였지만 이겼다는 표현이나 함락,평정 등의 승리를 뜻하는 용어들이 없는 관계로 왕건의 이 첫번째 전투는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다. 궁예의 세력이 강해지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북원의 양길은 자신의 관할 및 한산주 지역 호족들의 힘을모아 궁예를 공격하지만 이를 사전에 간파한 궁예의 공격으로 비뇌성 전투에서 참패하고 양길 또한 몰락하고 만다. 비뇌성에서 양길을 패배시킨 뒤인 900년(효공왕 4년) 왕건에게 명하여 광주, 청주, 국원경, 당성, 괴양 일대를 정벌하여 광주를 먼저 정복하고, 국원경과 청주 , 괴양의 적수 청길, 신훤 등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리고 901년(효공왕 5년) 7월에 스스로 후고구려왕을 자칭하였다. 

902년(효공왕 6년)부터 왕건을 서해안에 파견해 당시후백제 의 해상으로의 대중 교역로를 차단하게 하였고, 903년(효공왕 7년) 3월, 수군으로하여 후백제의 후방에 위치한 중요한 해상 거점이었던 금성 지역을 점령하면서 영토를 확장하였다. 뿐만아니라 왕건은 금성 공략과 함께 양주의 호족이었던 김인훈을 구하여 돌아온 공으로 궁예로부터 알찬의 관직을 받았다.

 

 904년(효공왕 7년) 7월에 궁예는 신라의 제도를 참작해 관직을 설치하고, 국호를 마진으로 바꿨으며, 연호를  '무태'라 했다. 이보다 앞선 903년부터 궁예는 수도를 이미 송악에서 자신의 첫 거점이었던 철원으로 다시 옮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철원과 부양 등지를 친히 돌면서 산세를 살피기도 하고, 청주의 민호 1천여 호를 철원으로 옮겼으며, 이듬해인 905년(무태 2년)에 송악에서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다. 궁예가 철원으로 도읍한 뒤에 세운 궁터는 구 철원 북쪽 30리, 현재 비무장지대 안에 위치해 있으며, 그곳의 지명은 풍천원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철원의 궁궐과 누대는 크고 화려하게 세워졌으며, 연호도 무태에서 성책으로 바꾸었다. 904년 상주와 근처의 30여 주현을 쳐서 정복하였고, 공주 장군 홍기가 찾아와서 투항했고, 또한 905년 평양성주 장군 검용이 항복했고, 증성의 적의, 황의의 도적 명귀 등이 복속해 와 궁예는 지금까지의 모든 전투들에서 승리를 거두어 '상승장군'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906년(성책 2년) 궁예는 왕건을 보내 후백제 견훤의 군대를 상주의 사화진에서 맞아 싸우게 했고 왕건의 군대는 견훤의 군대와 여러차례 치열하게 싸워 결국 크게 승리하였다.

한편 후백제의 견훤은 909년(성책 5년) 다시 나주 지역에 대한 공략을 실시하여 지금의 영산강 하에서 영광 서쪽 해안인 염해현까지 진격하였다. 6월에 왕건의 수군이 광주의 진도를 쳐서 차지하고 고이도의 항복을 받아냈으며, 목포에서 덕진포까지 진을 치고 있던 후백제의 수군을 화공으로 크게 이겼으며, 압해현의 해상 호족 능창이 왕건의 수군에 붙잡혀 궁예에게 보내져 처형당했다. 910년(성책 6년) 후백제의 견훤이 다시 3천명의 군사를 내어 나주를 10일간 공격하자 부하 장군에게 수군을 주어 공격해 견훤을 쳐서 몰아내고 나주 지역을 확실하게 지배하게 되었다. 이무렵 궁예의 판도는 남으로는 공주와 상주, 동북으로는 증성, 서북으로는 지금의 황해도와 평안남도 남부까지 이르러 국세를 크게 떨쳤다.

 

 911년(효공왕 14년) 국호를 '태봉'으로, 연호를 '수덕만세'로 개칭하고 궁궐을 증축했다. 태봉의 뜻은 주역에서 ‘태’는 ‘천지가 어울려 만물을 낳고 상하가 어울려 그 뜻이 같아진다’는 뜻이라 하고, 봉(封)은 봉토, 곧 땅이다. 결국 궁예는 철원을 기반으로 ‘영원한 평화가 깃든 평등 세계’, 곧 미륵세상인 대동방국의 가치를 높이 든 것이다.

913년(수덕만세 3년) 왕건을 문하시중  파진찬으로 임명해 수도로 불러들인지 1년만인 914년(정개 원년)에, 견훤이 나주를 공략해 오자 '수군의 장수가 지위가 미천해서 위엄을 널리 보일 수 없다.'며 다시 왕건을 시중에서 해임하고 백선장군으로 삼아 나주로 내려 보냈다. 이는 왕건 자신 또한 원하던 바이기도 했다. 지위가 시중에 이르면서 주변에는 그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생겨났고 궁예가 언젠가 자신에게 칼을 겨누게 될 것이라 생각해 위기의식을 느낀 왕건 스스로가 궁예에게 자청하여 변방으로 나갈 것을 청했던 것이다. 궁예는 그로 하여금 다시 수군을 지휘하게 명했고, 왕건이 다시 수군을 맡게 되자 한때 나주 지역을 압박해 오던 후백제와 나주 지역의 해상 군소 해상 세력들은 다시 위축되었다. 왕건은 나주 지역을 안정시키고 돌아와 해전과 해상 무역에 대한 계책들을 간언하자, 궁예는 '나의 여러 장수들 중에 누가 이 사람과 비길만 하겠는가?'며 왕건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궁예는 한편으로는 왕건의 세력과 입지가 강화되자 점차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915년(정개 2년), 그의 포악함을 보다 못한 왕후 강씨가 자신에게 간언하자, '네가 다른 남자와 간통하고 있지 않느냐. 나는 관심법으로 보아서 다 알고 있다.'며 불에 달군 쇠방망이를 가져다 왕후의 음부를 지져 죽이고, 자신의 두 아들마저 죽였다. 소위 '관심법'이라 칭하며 사람의 마음을 읽는 비상한 재주가 있다고 스스로 떠벌이곤 해서 수많은 장군들과 문신들을 역모죄로 몰아 죽이는 등 가혹한 공포정치를 행했다.

 

 918년, 궁예의 숙청에 위기의식과 반감을 느낀 홍유, 신숭겸, 배현경, 복지겸 등의, 궁예 정권에서 형성되고 성장한 직업 군인 세력들과 예전에 왕건이 시중 시절 청주인인 입방, 신전, 관서가 같은 청주인이고 궁예의 총애를 받았던 아지태에게 참소를 당해 위기에 처한 것을 구해준 것을 계기로 궁예에게서 이탈한 일부 청주인들이 주동이 되어서 패서 지역 호족들과 최응, 송함홍, 백탁, 허원 등의 유학자 관료들의 지지를 받아서 왕건을 추대할 계획을 세우고, 한밤중에 정변을 일으켜 대궐로 쳐들어갔다. 궁예는 철원을 탈출하여 달아나다가 객지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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