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1894년 7월 27일 ~ 12월 17일까지 김홍집 내각을 중심으로 군국기무처 주도 하에 추진되었다. 김홍집 내각이 교정청을 폐지하고 설치한 군국기무처는 김홍집, 김가진. 김윤식 등 17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임시 합의기관으로, 행정제도, 교육, 사법, 사회 등 전근대적인 여러 문제에 걸친 사항과 정치 제도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군국기무처의 회의총재는 영의정 김홍집이 맡았다. 특히 '개국' 기원 연호를 사용하여 청과의 동등한 관계를 나타냈고, 중앙관제를 의정부와 궁내부로 구별하여 기존 조선의 '6조 체계'를 8아문인 내무, 외무군무, 탁지, 학무, 법무, 공무, 농상 등으로 개편하였으며, 이를 의정부 직속으로 두었다. 궁내부는 전과 달리 왕실 사무와 정부 사무를 분리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탁지아문은 재정을 일원화하였고 은 본위 화폐 제도를 실시하고 도량형을 통일하였으며, 조세의 현금 납부제를 실시하였다. 또 경무청이 설치되어 경찰 제도가 실시되었다. 흥선대원군이 7월부터 8월까지 1개월 남짓 동안 섭정을 하였으나, 일본과의 심한 입장 차이로 은퇴를 강요당하게 된다
제2차 갑오개혁은 1894년 12월 17일 ~ 1895년 7월 6일까지 박영효과 김홍집의 연립내각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1차 개혁 전담기구였던 군국기무처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내각이라 고쳐 내각 제도가 되었고 그 아래 8아문이 개편된 7부를 두었다. 인사제도는 문무관을 개편하고 월급제도를 수립하였으며, 과거제도를 없애고 총리대신을 비롯한 각 아문 대신들에게 관리 임용권을 부여했다. 또한 행정제도를 지방 8도에서 23부로 개편하였으며, 신분제도의 개혁을 통해 문무, 반상의 구별을 폐지하였고, 지방 행정관에 의해서 집행되던 사법권을 폐지하고 독립된 재판소를 설치하였으며 군사적 권한을 더욱 중앙에 예속시켜서 근대 관료체제를 구축하였다
제3차 갑오개혁 또는 을미개혁은 1895년 10월 8일 ~ 을미사변 직후부터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 직전까지 제3차 김홍집 내각에 의하여 진행되었다. 친일세력들이 내각을 구성하여 주도한 개혁으로 가장 친일적 성향이 강했다. 이때 처음 태양력을 도입하여 1895년 음력 11월 17일을 1896년 1월 1일로 정하고, 이를 기념하여 연호를 '건양'으로 변경하였다. 단발령을 단행하였고, 정부 주도로 종두를 시행하였다. 또한 근대적 우편제도를 도입하기 위한 우체사가 설립되었다. 단발령의 강압적 시행은 을미사변으로 이미 격앙되어 있던 일반 백성들의 반일, 반정부 감정을 폭발시켰고, 대규모 항일의병운동으로까지 번지게 되었으며, 이 운동을 을미의병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갑오개혁이 발생하게 된 배경은 1882년 7월 23일 정계에서 쫓겨나 있던 흥선대원군이 임오군란을 재기의 기회로 삼으려다 청나라에 의해 실패하게되자, 민씨 척족을 중심으로 재편된 조선 조정은 청나라의 '양무운동'을 본받아 근대 개혁을 추진하려 하게된다. 정부 주도의 근대 개혁은 많은 재정을 필요로 했는데, 조선의 재정은 삼정의 문란으로 그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었으며 대일 무역 역조, 대청 무역 역조, 그리고 열강들의 각종 이권 침탈로 악화 일로였다. 심지어 정부 재정과 왕실 재정이 분리조차 돼있지 않았고, 양반 면세, 국가 전매 사업의 종친 독점 등 모순은 그대로였다. 설상가상으로 청나라가 파견한 묄렌도르프 등은 당오전을 발행시켜 가뜩이나 어려운 조선 경제를 파탄 직전까지 몰고갔다. 환율이 올라 무역 역조는 더욱 심화됐고, 지방관들은 원래 유통 화폐인 상평통보로 조세를 거둬 중앙 정부에는 그 오분의 일 가치밖에 되지 않던 당오전의 액면대로 조세를 대납해 그 차액을 착복하는 등 그 난맥상은 극에 달했다. 이에 박영효, 김옥균, 서재필 등의 '급진개화파'들은 일본식 서구화를 추진하려다가 민씨 척족들의 원한을 샀다. 그들의 개혁 노력은 고종을 감동시켜 다양한 기회가 주어졌으나 그 때마다 민씨 척족 등의 수구파들은 개화파들의 발목을 잡았다. 이에 개화파들은 1884년 갑신년 갑신정변을 일으키게된다. 그러나 청나라의 개입과 일본의 철수, 그리고 고종의 지지가 개화파를 떠나 갑신정변은 단 3일 만에 실패로 끝나고, 개화파들은 죽거나 혹 살아 남은 자들은 일본 배 치토세마루 호를 타고 망명길에 올랐다. 서재필을 제외한 대부분은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이어갔으며, 망명객들의 존재와 한반도 헤게모니를 두고 청나라와 일본은 늘 외교 문제에 갈등을 빚었다. 일단 청일 양국은 다음해인 1885년 톈진 조약에 합의하여 양국 군대를 한반도에서 동시에 철군시켰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며 삼남 지방의 농민 소요가 전국적으로 퍼져갔다. 이미 청나라와 결탁한 민씨 척족들은 청에 원군을 요청하였고, 이에 응해 청나라가 만주에 진주 중이던 군대를 남하시켰다. 동학농민군은 조선정부와 전주화약을 맺고 이후 중앙에는 교정청을 지방에는 중요한 재판을 할 때 농민이 같이 참여할 수 있는 농민자치기구 깁강소가 설치되어 갑오개혁이 시작되었다. 남하하던 이 전주화약으로 남하하던 청군은 군사를 물렸으고 톈진 조약으로 군사파견에 명분이 없어진 일본군은 한반도에 군을 상륙시켜 경복궁을 습격해 조선중앙정부기구를 차지하게 되며, 이를 갑오왜란이라고 한다. 그리고 바로 친일내각을 만들어 교정청을 폐지 군국기무처을 만들어 전주화약으로 만들어놓은 갑오개혁을 간섭하였다. 이후 경쟁하듯 농민군을 학살했다. 어느 쪽의 우위를 쉽게 점칠 수 없을 줄 알았던 청일전쟁은 일본군으로 급격히 기울었고 청나라는 한반도에서 곧 축출됐으며, '황해 해전'의 패배로 제해권 마저 잃게된 청나라는 즉시 요동의 여순 항, 산동 반도의 웨이하이웨이, 대만 등 동중국해의 주요 지점이 모두 일본 손에 떨어졌다. 전황을 계속 끌어 서구 열강들의 중재로 전쟁을 덜 불리하게 마무리하려 했던 청나라의 시도는 너무나 빠른 일본의 진공 속도에 눌려 금세 무산됐다. 시노모세키 조약으로 청일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나면서 일본에 망명 중이던 개화파가 모두 조선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일본의 위세를 등에 업고 일본식 개혁을 조선에 이식하려 했는데 이것이 '갑오개혁'의 배경이다
개혁 방향에 불만을 품은 일본 측과 고종, 명성황후 등의 공격으로 박영효가 일본으로 망명하게 되면서 개혁 내용은 크게 약화되었고, 김홍집 내각에 의해서 개혁이 이어졌다고 하지만 사실상 명성황후 시해와 아관파천 후 내각 요인들이 살해당하는 등의 문제로 갑오개혁은 종결되게 된다
'금융'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광해군의 중립외교 정책 (0) | 2022.11.29 |
---|---|
발해 대조영, 건국과 멸망 (0) | 2022.11.28 |
계유정난 (0) | 2022.11.28 |
연산군 이융 (0) | 2022.11.25 |
을사오적 이완용, 이지용, 이근택, 박제순, 권중현 (0) | 2022.1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