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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는 임진왜란이 끝나고도 9년이나 더 재위한 다음 1608년에 세자 광해군이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유능한 왕자로서 임진왜란 당시 항일의 공로도 매우 컸으나, 혈통상으로는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에 비해 불리한 조건에서 왕위에 올랐다. 선조의 적자가 아니라는 것이 광해군시대를 어렵게 만든 요인이 되었다. 광해군을 추종한 북인은 원래 동인 중에서 이황 문인을 제외한 여러 파벌이 연합한 붕당이어서 서경덕과 조식의 문인이 중심을 이루었다고는 하지만 쉽게 분열될 소지를 가지고있었다.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영창대군의 혈통을 존중하면서 훈척의 정치 간여에 비판적 입장을 지닌 명분주의자가 소북을 형성하였고, 광해군의 혈통상 문제보다는 항일의 공적과 능력을 존중하여 부국강병을 추구하려는 현실주의자가 대북을 형성하게된다. 대북파는 임진왜란중에 의병 활동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고, 그 여세를 몰아 소북파를 압도해 광해군을 추대한 후 권력을 잡았다. 대북파는 먼저 전쟁 중에 피폐된 산업을 복구하고, 부강한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토지 조사 사업과 호적 조사 사업을 실시하고, 공납제를 대동법으로 바꾸어 처음으로 경기도에서 시행하였으며, 성지와 무기를 수리하여 군사훈련을 강화했다.
이 밖에 전란을 전후하여 기근이 계속되고 질병이 만연하여 인명의 손실이 많았던 경험을 살려 허준과 정작으로 하여금 '동의보감'(1596~1610)을 편찬하게 하였다. 이 책은 도교 의술을 도입하여 조선 초기에 정리된 의학서를 한 수준 높였으며, 동아시아 의학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또한 '동국여지승람', '경국대전'. '국조보감', '고려사', '악학궤범', '용비어천가', '삼강행실도' 등 건국 초기에 간행되었던 문헌들을 재발행하고, 전라도 무주의 적상산에 사고를 새로 설치하는 등 문화 중흥에도 큰 힘을 기울였다.
한편, 인왕산 기슭에 왕기가 있다는 풍수가의 주장에 따라 1617년(광해군 9년)에 서대문 부근에 경덕궁을 건설한 것도 이때였다.
대내적으로 광해군은 붕당정치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처음에는 이원익을 비롯한 남인과 이이첨, 이산해, 정인홍 등 대북인을 골고루 등용했으나, 자신의 친형인 임해군과 인목대비의 아들인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에 위협을 느껴 1613년(광해군 5년)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고 영창대군을 살해하는 등 반대파 정적들을 제거했다. 이를 계축옥사 라 한다. 특히 1611년(광해군 3년)에 정인홍의 주장으로 남인의 추앙을 받던 이황과 이언적을 문묘제사에서 삭제하고, 이를 반대하는 성균관 유생들을 축출한 사건은 유생들의 반발을 사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광해군의 급진적 개혁은 왕권을 강화하고 국력을 키우는 데 큰 효과를 보았으나, 법가의 패도를 빌린 까닭으로 성리학의 명분론에 어긋나는 점이 많아 사림의 불만을 크게 사게 되었다.
광해군의 재임시절의 정책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대외정책이었다.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면서 조선을 도왔던 명나라는 왜란 후 국력이 많이 쇠약해졌다. 이 틈을 이용하여 압록강 북쪽에 살던 여진족 사회에서는 급속한 통일운동이 일어났다. 만포진 건너편 주위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는 흥경노성을 근거로 하여 주변의 여진족들을 복속시키더니, 1616년(광해군 8년) 마침내 나라 이름을 ‘후금’이라 하고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다. 누르하치는 계속하여 서쪽으로 세력을 뻗었으며 1618년에는 푸순을 점령하고 명나라에 대하여 대대적인 전쟁을 선포했다. 명나라는 많은 병력을 풀어서 후금을 공격하는 한편, 조선에 대해서 지원병을 보내줄 것을 요청해 왔다. 조선은 명나라의 요청을 받아들여 1619년 1만 3천 명나라의 원병을 보냈으나,광해군은 강홍립에게 정세를 파악하여 상황에 맞춰 행동하라 지시하였다. 도원수 강홍립은 후금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후금과 휴전을 맺었고, 그 후 명나라는 모문룡 부대를 압록강 입구의 가도에 주둔케 하였으나, 조선 측은 그들의 식량을 지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후금과 친선을 도모하여 중립적인 정책을 취했다. 다시 말해 명나라와 후금의 싸움에 말려들지 않으면서 내치와 국방에 주력하는 실리정책을 펴나갔다. 이를 광해군의 중립외교 라고하며, 이 일을 빌미로 '인조반정'이 일어나게 된다.
'인조반정' 세력들은 광해군의 폐정을 이유로 정변을 일으킨 것이었는데, 이들이 거론한 명분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여러 차례의 옥사를 일으켜 형과 동생, 조카 등을 무고하게 죽여 반인륜적인 행위였다. 광해군은 즉위하자마자 동복형인 임해군이 사병을 키우고 역모를 꾀했다는 등의 이유로 유배하였다가 교동의 위소에서 죽였다.
1613년(광해군 5년)에는 계축옥사로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을 죽이고 영창대군을 강화에 유폐하였는데, 이듬해 강화부사 정항이 그를 잔인하게 증살하였다. 또한, 정원군의 아들이자 인조의 막내 동생인 능창군 이전을 역모 혐의로 국문하고 교동에 금고하였다가 자살하도록 만들었다. 대비 김씨에 대해서도 역시 계속 압박을 하던 중 1617년(광해군 9년) 무렵부터는 폐모론이 대두되었고, 결국 존호를 폐하여 서궁이라 칭하고 각종 공헌을 금지시키며 경운궁에 유폐하였다.
둘째, 인사의 파행과 지나친 토목공사로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린 것이었다. 광해군은 창경궁, 창덕궁을 중건하고 종묘를 중건한 것 외에 이후 새로이 경복궁 서쪽에 인경궁을, 새문동에 경덕궁을 건설하여 토목공사가 끊이질 않았다. 또한 자신들의 측근들과 측근들의 요청 및 뇌물 등에 따른 파행적인 인사와 과도한 부역과 세금으로 민생을 망가뜨렸다는 지적이었다.
셋째, 명은 임진왜란 당시 원병을 보내어 우리를 구원한 재조의 은혜가 있는 나라인데 명의 요청에도 파병을 주저하고 1619년(광해군 11년) 심하 전투에서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투항하는 등 명을 배신하는 행위를 함으로써 조선을 오랑캐와 금수 같은 나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원병을 보내는 문제에서만큼은 이이첨마저도 춘추의 대의를 말할 정도로 비판적이었다.
이러한 세가지 명분으로 반정을 주도한 이들은 훗날 즉위한 능양군과 그의 인척, 그리고 병권을 관장할 수 있었던 서인들이었다. 능양군의 친척으로는 무인 신경진과 이서, 구인후·구굉 등을 들 수 있는데, 이중 신경진을 통해 김류, 이귀와 연결되었고, 다시 이들을 통해 김자점, 이괄 등이 함께 하였다.
이들은 원래 1622년(광해군 14년) 가을 이귀가 평산부사에, 신경진이 효성령별장에 있을 때 호랑이 사냥을 명분으로 군사의 이동 경계의 제한을 철폐하여 그것을 기회로 거사하려고 하였으나, 사전에 정보가 누설되어 실패하였다. 다행히도 이들의 거사 시도는 김자점과 심기원 등이 후궁에 청탁을 넣어 해결되었으나 그 이듬해에도 이들의 계획이 시행전에 누설되어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추국청까지 설치되어 관련인들이 모두 잡힐 상황이 되자 곧바로 1623년(광해군 15년) 3월 13일 새벽에 거사 진행하였다. 김자점, 한교, 이귀 등이 먼저 홍제원에 모이고, 뒤이어 이서가 이끄는 장단의 군사와 김류가 이르렀다. 능양군은 친병을 거느리고 연서역에 이르러서 이서의 군사를 만났다. 전체적인 군사 규모는 장단의 군사가 약 7백여 명이며 기타 인물들이 이끈 군사또한 700명 정도로 1400여 명 남짓이었다. 이들은 3경 무렵 도성의 북소문인 창의문을 돌파하고 창덕궁으로 향하였다. 이 때 궁성의 수비를 책임지던 훈련도감 대장 이흥립 또한 반정군과 함께 하였다. 궁중에서의 연회가 무르익고있던 광해군은 반군이 대궐에 들어간 뒤에야 후원에서 담을 넘어 피신하였다. 광해군은 의관 안국신의 집에 도망쳐 안국신이 쓰던 의관을 쓰고 숨어 있었으나, 국신이 반정 세력에게 알려 잡히고 만다. 세자였던 이지 역시 장의동 민가에 숨었다가 반군들에게 잡혔다. 당시 광해군은 이이첨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생각할 정도로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후 반정 세력과 능양군은 경운궁에 유폐중인 대비 김씨에게 직접 찾아가, 보새를 바쳤다. 이에 대비가 광해군을 폐하고 경운궁의 별당에서 능양군을 즉위시켰으니, 이가 바로 인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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