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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발해 대조영, 건국과 멸망

투데이_시크릿 2022. 11. 28. 16:47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의 아버지는 걸걸중상이고, 어머니의 이름은 사서에 전하지 않는다. 대씨와 태씨 족보에 의하면 대조영의 어머니는 시씨라고 한다. 대한민국 역사학계에서는 대조영에 관한 다양한 견해가 표명되어 왔지만, 일반적으로 구당서에 나온 고려 별종으로 보아 고구려 장군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왜냐하면 신당서의 기록은 전반부는 발해국기, 후반부는 구당서에 의거해 서술된 것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그 외의 주장으로는 말갈족으로서, 고구려에 복속된 뒤, 고구려화 과정을 거친 말갈계 고구려인 또는 송화강 유역에 거주하던 고구려인라고 본다. 대조영이 수나라 개황 연간 돌지계가 이끌고 수나라로 귀부하여 유성에 정착하게 된 속말말갈의 후손으로 보아, 그의 출자에서 고구려를 배제하는 학설도 존재한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인 송기호는 여러 정황상 대조영은 말갈족이지만, 고구려에 귀속되어, 일정 부분 고구려화되었고, 걸걸중상을 거치면서 더욱 가속화되어 말갈계 고구려인으로서, 고구려 귀속의식이 나타나게 되어 훗날 발해국을 운영하는 기지가 되었다고 발언했다. 서강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인 이종욱은 자신의 저서인 '고구려의 역사'에서 발해에는 고구려인들이 많이 살았고, 발해는 고구려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았으며, 더욱이 속말말갈인 대조영은 고구려의 장군으로 있었기에 새로운 왕국을 세울 정보와 힘을 갖출 수 있었던 것 등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6세기 후반, 고구려 '연개소문'이 사망한 직후 그의 세 아들인 1남 연남생, 2남 연남건, 3남 연남산의 권력 다툼을 벌였다. 결국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1남 연남생은 당나라에 망명하였다. 당나라는 667년 1남인 연남생을 앞세워 고구려를 침공강행하였다. 최고 권력자였던 연남생의 합류로 고구려는 크게 무너져 당나라는 파죽지세로 평양성으로 진격했다. 결국 668년 평양성이 함락하게 되고 약 700년 역사의 고구려는 멸망하게 된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옛 고구려 영토에는 당나라가 통제하는 안동도호부가 세워졌고, 남아있던 고구려 세력 또한 671년 안시성 함락을 끝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 대조영 일가는 고구려 영주로 이주했다. 대조영 이주의 계기가 강제였는지, 아니면 자의였는지 단정키 어려운 바이나, 걸사비우와 걸걸중상이 각각의 동질성이 강했던 점으로 보아, 이 두 집단은 영주에 예속되어 있을 때부터 집단적으로 당나라에 예속된, 곧 일종의 기미주와 같은 양태하에 처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696년 영주에서는 당나라의 지나친 강압 정책에 대한 거란의 반란이 일어났다. 그로인해 생겨난 혼란을 틈타 고구려 유민 걸걸중상과 말갈 걸사비우는 영주에서의 이탈을 감행했고, 측천무후의 회유책에도 불구하고 동쪽으로 이동, 애히고가 이끄는 당나라의 추격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때 걸사비우와 걸걸중상이 죽게되고, 대조영은 남아있는 고구려 유민과 걸사비우의 말갈을 합병하여 이끌게 되었다. 대조영은 698년 천문령 전투에서 당나라의 추격군을 격파해 승리하고 읍루의 동모산 지린성 돈화 부근에서 발해를 건국하였다. 당의 북진 정책을 위협하던 돌궐족과 손을 잡아 대당 견제세력을 구축했다.

 

 700년에는 발해가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했다. 신라와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친밀한 것도 아니었다. 신라의 유학자 최치원은 '발해의 왕인 고왕이 신라와 수교를 맺고 싶어 사람을 보냈는데, 효소왕이 이를 기특하게 여겨 고왕에게 '대아찬'이라는 관작을 하사하였다'라는 기록을 사불허북국거상장, '동사강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신라와 발해는 당시 몇 차례 교류가 있었으나 아쉽게 친선적인 관계로는 발전하지 못했다. 이는 양국이 그 무렵에는 국경을 접하고 있지 않아 직접적인 접촉이 없었기 때문이다. 신라와 발해가 본격적으로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8세기 초반에 발해가 본격적으로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처하고 양국이 함흥 일대에서 직접 국경을 접하면서 부터다.

대조영은 705년 당나라와 화친하였고, 713년 당나라는 명목상 고왕을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 홀한주도독부도독으로 책봉하였다. 719년, 고왕이 사망한 뒤 그의 아들 무왕이 왕위를 이었다. 당나라는 발해를 고립시키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고왕은 돌궐족과 동맹 관계를 형성하며 고립 관계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이는 발해의 세력이 건국 초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성해졌음을 뜻한다. 

 

  9세기 '해동성국'의 번영을 누리던 발해가 거란에게 무기력하게 무너진 이유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지배층 사이의 내분이 주요한 멸망 원인으로 거론되지만 이 또한 석연치 않다. 그렇다 하더라도 발해가 멸망에 이르게 되는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마지막 사건이 거란의 침입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거란은 당의 멸망 이후 중원의 분열 속에 요동 지역으로 진출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한 가운데 915년 10월에는 야율아보기가 직접 압록강에서 낚시를 하고, 신라는 거란에 방물을 바치고 태봉은 고려 보검을 바치는 등 발해의 신경을 자극하는 일들이 발생하였다. 발해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신라와의 결원을 시도하기도 하였으나 소득은 없었다. 거란은 빠른속도로 강해지고 있었고, 신라, 태봉 및 그 뒤를 이은 고려는 거란과의 교류를 행하고 있었던 까닭에, 발해 역시 918년 2월 거란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920년 발해인 4명이 일본으로 망명하는 등 서서히 발해 내부에서 분열의 조짐이 보여지고 있었다. 또한 발해의 영향 아래 있던 여진이나 흑수, 달고 등이 이탈하게되면서 독자적으로 신라나 고려, 중원과 접촉하는 등 발해의 주변 민족에 대한 통제력도 상당히 약해지고 있었다. 거란이 계속해서 요동으로 진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발해는 924년 5월 요주를 공격하여 자사 장수실을 죽이고 그곳의 백성들을 약탈하였다. 당시 거란은 서방 원정에 집중하고 있었던 상황이었고, 이후 924년 7월 거란은 발해를 공격했으며, 발해는 회골과 여진, 황두실위 등을 동원하여 거란을 공격하였다. 다시 9월 거란이 발해를 공격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러한 양국간의 공방은 발해가 926년 거란에 의해 한순간에 멸망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925년 9월 서방 정벌을 마치고 돌아온 야율아보기는 12월에 ‘두 가지 일 중 하나는 이미 완수하였고, 발해는 대대로 원수인데 아직 갚지 못했다.’는 조서를 내리며 서방 원정을 성공으로 이끈 자신감 속에 발해와의 전쟁에 나섰다.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정한 야율아보기는 12월 자신의 조상들이 살았던 곳인 목엽산에서 제사를 지냈고, 다시 오산)에서 청우와 백마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다. 산갈산에서 귀전을 쏘며 출정을 알렸으며, 상령을 거쳐 발해의 부여부를 포위하여 부여성을 빼앗았다. 발해의 노상이 이끄는 3만 명의 군사는 거란의 1만 기병과 전투하였으나 패배하였다. 부여성이 함락되자 거란군은 바로 발해의 수도인 홀한성으로 진군하였고, 결국 대인선은 항복하였다. 항복 후에 대인선은 흰 옷을 입고 300명의 신하들과 함께 항복 의식을 치뤘다. 야율아보기는 발해에 군현을 설치하였다. 야율아보기와 거란의 군사들은 9일 간 천 리를 이동하여 부여부에 이르러 포위하고 단 3일 만에 부여성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6일 만에 발해의 수도 홀한성에서 대인선의 항복을 받아냈다. 보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에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킨 것이다. 너무 쉽게 무너진 현실을 믿기 어려웠던 것인지 대인선은 틈을 타 반란을 일으켰지만 이미 기울어진 국운을 되돌릴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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