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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선덕여왕 덕만

투데이_시크릿 2022. 12. 1. 10:30

 신라 제 27대왕 선덕여왕에 대한 출생에 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삼국사기'에는 진평왕의 맏이로, '삼국유사'에는 형제자매 서열에 관한 기록이 없이 진평왕의 딸로만 기록되어있다. 진평왕이 아들 없이 승하하자, '화백회의'에서 진평왕의 왕녀인 덕만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여, "성스러운 조상의 혈통을 이어받은 여황제"라는 뜻을 가진 '성조황고'라는 존호를 올렸다. '삼국유사' 왕력 편은 “김씨 성골의 남자가 다하였으므로 여왕이 왕으로 선 것이다” 라고 사실을 알리고 있다.

즉위한 해인 632년(건복 49년)에 을찬 또는 을제로 하여금 국정을 총괄하게 하였고, 각지에 관리를 파견하여 홀아비, 홀어미, 고아, 독거노인 등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돕게 하였으며, 당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당 태종은 빨강, 자주, 하얀색의 모란 그림과 그 씨앗을 선물로 보냈다. 왕은 이를 보고 “이 꽃은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씨앗을 심어보니 과연 그랬다. 훗날 신하들이 이 일을 물어보니 왕은 “꽃 그림에 나비가 없었다. 이는 배우자 없는 나를 희롱한 것이다.”라고 답했다. 일연은 이 고사를 소개한 뒤, 당 태종 신라에 세명의 여왕이 있을 것으로 짐작한 점도 함께 칭찬하고 있다

633년(건복 50년) 정월에는 스스로 신궁에 제사를 올리고 여러 주·군의 조세를 1년간 감해 주었다. 또한 8월에 백제가 서쪽 변경을 침공하였다.

 

즉위 3년째인 634년(건복 51년)부터 인평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이 해에 '분황사'가 완공되었다. 635년(인평 2년) 겨울에는 이찬 수품과 용수를 시켜 각지의 민심을 위로하게 하였으며, 또한 당으로부터 주국 낙랑군공 신라왕에 봉해졌다. 영묘사를 세웠으나 어느 겨울날, 영묘사 옥문지에 개구리가 사나흘 동안 운 일이 있었다. 이에 왕은 각간 알찬, 필탄에게 병사 2천을 주어 서라벌 서쪽 부산 아래 여근곡을 공격하게 하였다. 여근곡에는 백제 장수 우소가 매복해 있었는데, 알천과 필탄은 이를 쳐서 모두 죽였다.

훗날 신하들이 이 일을 물어보니 왕은 “개구리가 심히 우는 모습은 병사의 모습이요, 옥문이란 여자의 음부를 가리킨다. 여자는 음이고, 그 빛은 백색인데, 이는 서쪽을 뜻한다. 또한 남근이 여근에 들어가면 죽는 법이니 그래서 쉽게 잡을 수 있었다.”라고 답하였다. '삼국사기'에서는 옥문지에서 개구리가 운 때를 즉위 5년인 636년 5월로 기록하고 있다

 

636년(인평 3년) 정월에는 수품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3월에 병이 나자 이를 기양하기 위해 활룡사에서 큰 법회를 열었다. 같은 해, 자장법사가 불법을 배우기 위해 당으로 들어갔다. 5월에 백제 장군 우소가 여근곡에 쳐들어오자 알천, 필탄 두 장군을 보내 이를 무찔렀다. 638년(인평 5년) 10월에는 고구려 칠중성을 공격해 왔고, 다시 대장군 알천을 파견해 이를 격퇴하여 민심의 불안함을 달랬다. 639년(인평 6년), 북부 국경을 방비하기 위해 하슬라를 북소경으로 삼고 사찬 진주를 보내 지키게 하였다. 640년(인평 7년)에는 귀족 자제들을 유학생으로서 당의 '국자감'에 입학하게 하였다. 642년(인평 9년) 정월에 다시 당에 조공하였다. 7월에 백제의 의자왕이 이끄는 군사들이 신라의 서쪽 40여 개 성을 함락시키고, 여기에 지 당과의 외교 거점이었던 당황성을 공격해오자 당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11월에 백제가 대야성을 함락시켰고, 김춘추의 사위인 이찬 품석 등을 죽였다. 정세가 불리해지자 왕은 김춘추 고구려에 보내어 동맹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고구려 보장왕은 신라가 차지한 죽령 이북의 땅을 반환할 것을 선제 조건으로 요구하였지만 김춘추가 거절하였기에 그를 감금하였다. 협상이 결렬되자 왕이 김유신을 보내 한강 북부까지 진격하였고, 보장왕 김춘추를 풀어주었다.

 

643년(인평 10년) 정월에도 당에 토산품을 바쳤다. 9월에 당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으나 당 태종은 이를 거절하였고, 644년(인평 11년) 정월에 신라는 다시 당에 조공을 바쳤다. 이에 당 태종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공격을 멈추라고 종용하였다. 이에 연개소문은 “일전에 고구려 수나라가 전쟁을 벌일 때 그 틈을 타서 신라가 빼앗아간 우리의 영토 500리를 돌려주기 전에는 싸움을 멈출 수 없다”며 거절하였다. 9월에 왕은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삼고 백제를 공격하여 일곱 성을 빼앗았다. 645년(인평 12년) 정월에도 당에 조공을 바쳤다. 백제와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자장법사의 건의로 3월에 황룡사탑을 세웠다. 5월 당 태종 고구려를 침략하자 군사 3만을 파견하여 이를 도왔다. 그러나 그 사이에 백제에게 또 다시 일곱 성을 빼앗겼다. 11월에는 비담 상대등으로 삼았다.

 

재위 마지막 해인 647년(인평 14년) 정월, 상대등 비담 염종과 함께 “여자 군주는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월성에 진을 치고 김유신을 파견하여 비담을 상대하게 하였다.

비담은 월성을 먼저 장악한 김유신에게 밀려 명활산성에 진을 치고 대치하였다. '삼국사기'김유신 열전에 따르면, 비담의 반란은 10여 일 만에 진압당했다. '삼국사기' 진덕여왕조에 따르면,비담  염종을 포함한 그의 일족 30명은 정월 17일에 처형됐다. 그러나 비담의 난이 진행되는 도중인 647년1월 8일, 선덕여왕은은 승하하였으며, 시호를'선덕'이라고 하였다. 

선덕여왕이 승하하기 전 어느날 신하들을 불러 “내가 죽으면 도리천에 장사지내도록 하라. 이는 낭산 남쪽에 있다.” 라고 하였다. 이후 왕이 죽은 뒤 신하들은 왕을 낭산 남쪽에 장사지냈다. 이후 649년 문무왕 대에 이르러 선덕왕의 무덤 아래 사천왕사를 세웠다. 이는 불경에 “사천왕천 위에 도리천이 있다”라는 내용이 실현된 것이었다

 

이후 진덕여왕이 신라의 제28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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