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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오적은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에서 을사늑약의 체결을 찬성했던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외무대신 박제순의 다섯 명의 매국노를 일컫는 말이다. 당시 대신 중 수상격인 참정대신 한규설과 법부대신 이하영, 탁지부대신 김영기는 조약에 반대했고, 궁내부대신 김재극은 조약 체결과 직접 관계가 없었다. 조약이 체결되자 이에 반대했던 한규설은 일본의 압박으로 물러가고, 조약에 조인한 외부대신 박제순이 참정대신이 되었다. 이하영은 초기의 반대 의견을 곧 뒤집은 뒤 조약 체결 과정에서 박제순보다 더 강하게 활약을 하였으나 처음에 반대한 사실 때문에 을사오적에서는 빠졌다. 을사오적은 매국노의 대명사로 이후 수도없이 많은 암살의 위협에 시달렸다. 오기호, 나철이 을사오적 암살단을 구성한 바 있다.
여기서 을사조약이란 1905년 11월 17일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이다.대한 제국의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제국의 주한 공사 하야시 곤스케에 의해 체결되었다. 불평등 조약임을 강조하기 위해 을사늑약이라고 불린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일본의 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받았으며, 8월에는 제2차 영일동맹조약을 통해 영국으로부터도 한국에 대한 지도 감리 및 보호의 권리를 인정받은후,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해 이 조약을 강제하여 체결하였다. 1965년에 박정희 정부와 일본 정부는 한일 국교를 정상화하는 한일기본조약의 제29조를 통해 이 조약이 '이미 무효'임을 상호 확인하였다. 체결 당시에는 아무런 명칭이 정해지지 않았으며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 조선총독부에 의해 편찬된 고종실록에는 '한일협상조약'이라고 기재되었다. 1905년인 을사년에 체결되었기 때문에 을사협약, 을사오조약, 또는 불평등 조약임을 강조하는 목적으로는 을사늑약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일본어로는 보통 제 2의 일한조약(다이니지닛칸쿄야쿠) 또는 일한보호협약(닛칸호고조야쿠])이라고 부른다
1907년 2월 나인영 등은 200명을 모집하여 을사 오적을 암살할 목적으로 '자신회'를 결성하였다. '자신회'는 단체 결성의 목적을 알리는 취지서와 을사오적 암살을 알리는 포고문, 애국가, 참간장, 동맹서, 자현장 등을 작성하여 매국노 처단의 정당성을 알렸다. 그 외에도 이홍래, 김동필, 박대하, 이용채 등은 전라·경상도에서 의병의 모집과 무기의 구입을 맡았으며, 김인식 등은 거사에 필요한 경비를 조달하였다. 1907년 2월 말부터 이들은 을사오적을 암살하려 세번의 시도를 했으나 번번히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1907년 3월 25일 자신회는 네번째 거사를 시도했다. 결사대를 보내어 저격할 계획이었다. 오기호 등의 '자신회' 회원들은 6개의 조로 나뉘어서 을사오적의 암살이라는 거사에 나섰다. 그러나 6개조 중 이홍래의 조만이 궁으로 들어가고 있던 권중현을 저격하는 데 성공했을뿐 안타깝게 사살 하지는 못했으며, 나머지는 모두 실패했다. 권중현을 저격했던 강상원 체포된 후 '죽고 사는 것은 처분에 맡기겠다.'며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 나인영과 오기호는 체포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스스로 자수했다. 이 사건으로 30명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으며, 5~10년의 유배형을 선고받았으나, 1907년 12월 고정의 특별 사면으로 석방하게 된다.
전덕기와 기산도도 각각 을사오적 처단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고만다. 또한 을사오적의 대표적 인물인 이완용은 1909년 12월 22일 이재명에게 칼을 맞았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과 광복회가 공동 발표한 친일파 708명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을사오적 모두가 선정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 김동주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서는이완용과과 권중현, 박제순, 이근택,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는 이지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들은 친일파로 경술국치를 일으킨 사람들이다.
경술국치란 한일 병합 조약에 의거 일본제국이 대한제국을 병합 통치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1910년 8월 29일 병합 조약의 발표와 함께 일본 제국 천황이 한국의 국호를 고쳐 조선이라 칭하는 안건과 한국 병합에 관한 조서를 발표하여 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되었다. 다른 말로는 한일병탄, 국권피탈, 한일합방이라고 부르며, 모두 같은 뜻이다.
당시 을사오적의 나이, 직위, 이후 경력은 아래와 같다
이왕용 : 1858년(47세) / 당시 직위 : 학부대신 / 이후 경력 : 후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겸 부의장
이지용 : 1870년(35세) / 당시 직위 : 내부대신 / 이후 경력 : 백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이근택 : 1865년(40세) / 당시 직위 : 군부대신 / 이후 경력 : 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박제순 : 1858년(47세) / 당시 직위 : 외부대신 / 이후 경력 : 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권중현 : 1854년(51세) / 당시 직위 : 농상공부대신 / 이후 경력 : 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이완용 1909년 이재명의 암살 미수 사건 때 폐에 상처를 입은 뒤로 이완용은 매년 겨울철만 되면 해소와 천식, 폐렴과 흉통 등으로 괴로워했다. 일본에서 의사들을 불러 그 후로도 계속 정기적인 진료를 받았으나 나아지지 않았다. 시들어가는 몸과는 반대로 그의 재산은 미친듯이 늘어나기만 했는데, 특히 땅 재산은 1억 3천만 평까지 불어났다. 당시 조선인 가운데 왕을 제외하고 가장 부자라는 소문까지 있었지만 폐렴과 해소 증상은 어쩔 수 없었고 죽을 때까지 흉통에 시달렸다. 이런 증상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심해졌다.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귀족 가운데서도 가장 부유하게 살았다는 말이 전해진다.2007년 11월 22일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이지용의 재산에 대해 국가 귀속 결정을 내렸다.
박제순은 한일 병합 조약 이후 경학원의 대제학에 임명되어 친일 활동을 지속하였으며 박제순의 상속자 박부양은 중추원 서기관을 지냈으며, 이들 부자는 일제 강점기 동안 남부럽지 않게 부유한 생활을 하였고, 1916년 병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