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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임오군란

투데이_시크릿 2022. 11. 24. 11:19

 1873년 탄핵으로 인해 흥선대원군은 세력을 잃고 지위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점점 증가하는 서구 세력의 압박으로 백성들의 민심은 아직 쇄국에 머물러 있었고 흥선대원군 또한 최익현  척화파들과 계속 소통하면서 아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서계 문제가 확대되 다시금 척화파들이 여론을 등에 업으려던 순간, 운요호 사건으로인해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며 조선은 쇄국을 버리고 개국, 개화로 향하게 됐다. 흥선대원군을 중심으로 하는 척화파는 관직에서 밀려나고 투옥되는 등, 고종 부부 측의 척족을 중심으로 하는 수구파, 개화파가 정치 전면에 나섰다. 민씨 정권은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서양 열강과의 불평등 통상조약을 연이어 맺었는데, 이는 척화파는 물론 민심의 큰 반동을 불러일으켰다. 삼정의 문란 때문에 가뜩이나 위태로운 조선에 사회적 혼란과 불안이 증폭됐고, 흥선대원군 등 척화파는 이러한 정세를 이용해 이재선 역모사건을 시도하는 등 끊임없이 정권 재창출을 노렸다. 민씨 정권은 아직 확고하지 않은 자기 정권 기반을 다지기 위해 내외로 자기 척족들과 개화파 관료들을 대거 기용하는 한편, 1881년 일본의 후원으로 신식군대 ‘별기군'을 창설했다. 총책임자는 민영환의 부친, 민겸호 대감이었다. 1882년에는 종래의 훈련도감·용호·금위·어영·총융 5영을 장어영, 무위영 2영으로 축소하면서 대량 해고 시키고 봉급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등, 민씨 척족들의 사병과 다름없는 '별기군'과 달리 차별했다. 훈련도감 출신 구식 군인들은 당시 일본군을 모델로 신설된 '별기군'을 ‘왜별기’라 낮춰 부르며 증오했는데 특히 봉급 연체를 초래한 정부 재정 위기의 원인이 민씨들의 탐욕에 있다고 생각했으며, 특히 선혜청 당상 겸 병조판서 민겸호 선혜청 전임 당상이자 전 호조판서 김보현이 원흉으로 지목됐다. 그리고 흥선대원군의 친형이었지만 명성황후를 지지하여 문호개방에도 지지하고 있는 흥인군 이최응도 구식군대의 표적이 되었다. 흥인군은 흥선대원군의 친형이었지만 동생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명성황후를 지지하며 동생의 쇄국정책에도 크게 반대하면서 대립과 갈등관계를 맺었다.

 

 7월 22일, 흥인군 이최응이 별파진을 동원해 소요를 초기에 진압하도록 고종에게 간청했다. 이를 알게 된 가담자들은 더욱 격분했으나 일단 이튿날 유추만과 김장손이 자신들의 상관인 무위대장 이경하의 집으로 가 작성한 통문을 보이고 억울한 사정과 단호한 조치를 호소했다. 그러나 이경하는 달랑 직필 서신 한 통을 써주고 민겸호에게 직접 가라며 한발을 뺐다. 할 수 없이 민겸호의 자택으로 향한 그들은 다짜고짜 민겸호의 집안으로 진입했으나 민겸호는 부재중이었고 대신 가재도구를 전부 때려부쉈다. 이판사판이 된 그들은 우선 운현궁으로 몰려갔다. 민씨들에게 밀려 10년 가까이 실각했던 흥선대원군에게 이는 재집권의 좋은 기회였다. 자초지종을 들은 흥선대원군은 밀린 봉급의 전액 지급을 약속하며 일단 별도의 명이 있을 때까지 그들을 대기토록 하고 유추만과 김장손 등을 불러 심복 허욱과 긴밀히 협력토록 했다. 뒷배를 얻은 병졸들은 곧 조직적인 행동에 들어갔다. 일부는 동별영의 무기고를 약탈하고 포도청을 파옥해 유복만, 김춘영 등을 구출하는 한편, 일부는 의금부를 급습해 척사론자인 백낙관 등 정치범들을 석방시켰다. 또 일부는 전직 선혜청 당상 김보현 관찰사로 있던 경기감영에 쳐들어 갔고 나머지는 강화유수 민태호를 비롯한 외척 수구당들의 집을 급습했다.

 

 대원군은 민심을 얻기 위해 일개 해직자 소요를 위정척사 운동으로 확대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 날 저녁 대원군의 수하들과 병졸들이 일본 공사관을 포위·습격했다.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토모 등 공관원 전원은 제물포 항으로 도피했고 공사관은 불타올랐다. 민씨 척족의 사병과 다름없던 '별기군'과 충돌한 그들은 곧 '별기군'마저 제압하고 '별기군' 병영 하도감에서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 레이조 공병 소위를 비롯 일본인 열 세 명을 살해하는 등 정변을 조직적으로 전개시켰다.

 7월 24일 흥선대원군의 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전 민씨는 일단 궁궐 뒷문으로 나가 무예별감 홍계훈에게 업혀 충주 장호원의 충주목사 민응식의 집으로 도망갔다. 대신 선혜청 당상 민겸호와 경기도 관찰사 김보현이 궁궐에서 발각돼, 심하게 구타를 당한 끝에 중희당 아래서 살해됐다.

 처음엔 단순 해직자 소요에 지나지 않던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무위대장 이경하가 직접 동별영에 가서 부하들을 진정시켜 보려했지만 무리였다. 뒤늦게 조정은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이미 죽은 선혜청 당상 민겸호 및 도봉소 당상 심순택,  무위대장 이경하, 장어대장 신정희 등을 파직시키고, 무위대장 후임으로 대원군의 장자 이재면을 임명했다. 한편 개화당이자 '별기군' 영병관 윤웅렬이 일본공사 앞으로 서한을 보내 정변을 알렸으나, 이미 일본 공관원 전원은 제물포로 피했다. 고종은 대원군의 복귀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흥선대원군은 부대부인 민씨와 장남 이재면을 데리고 입궐했다. 훈련도감 출신 난 가담자 200 명이 흥선대원군을 호위했다. 다시 조정을 장악한 흥선대원군은 고종에게 자책교지를 반포시켜 군란을 정당화하였으며, 5영의 복구와 통리기무아무의 폐지, 그리고 삼군부 설치를 발표했다. 이재면에게 훈련대장, 호조판서, 선혜청 당상을 겸임케 하여 밀렸던 봉급의 지급은 물론 군사와 예산을 장악하려한 흥선대원군은 중앙의 각 부서와 지방의 관찰사 등의 민씨 척족들을 파직하고 척화파를 임명했다.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난 가담자들에게 해산을 명하는 한편, 대대적인 사면령도 내렸다. 그럼에도 난 가담자 중 일부가 중전 민씨 처단까지 해산을 거부하자 흥선대원군은 중전의 실종을 사망으로 단정하고 국모 상 을 공포해 해산을 관철했다.

 

 7월 24일 민씨 외척들은 당시 영선사로 청나라에 체류하고있던 어윤중, 김윤식 등에게 급보를 보내 청에 원조를 요청했다.

8월 1일 주일 청국 공사 여서창이 '일본 병선이 조선으로 가니 중국 병선을 앞서 파견해야 한다'는 내용을 본국에 전파함에 따라 이튿날 북양대신 이홍장의 직무대리 장수성 북양함대 제독 정여창에게 출동을 명령하였다.

8월 7일 북양대신 직무대리 장수성 오장경에게 덩저우 의용군 3천 명을 조선에 파병토록 지시했다. 8월 10일 북양수사 대리 정여창 북양함대의 함선 3척 초용, 양위, 위용에 병력 500명과 이홍장의 사신 자격으로 마건충을 싣고 1차로 제물포에 입항했다. 같은 날 이홍장의 참모 설목상이 제안하고 장수성, 그리고 영선사 김윤식의 찬성으로 흥선대원군 납치안이 채택됐다. 8월 12일 일본군의 대대 병력 300 명이 제물포에 상륙했다. 약 20일 전, 공관을 미리 탈출한 하나부사 요시모토가 공사 및 공사관원들은 즉시 정변을 본국에 타전했었고 이에 일본이 파병한 군함 4척과 보병 1개 대대였다. 그러나 청의 신속한 군사행동과 10배에 달하는 병력 차이로 인해 적극적으로 자국민 보호나 난 진압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8월 13일 현실을 인지한 일본의 이노우에 가오루 외무경은 흥선대원군의 쿠데타 정권을 인정하는 비밀 훈령을 작성했다. 8월 18일 하나부사 공사에게 훈령이 도착했다. 8월 20일 회군 대장 오장경 정여창의 배를 타고 영선사 김윤식을 대동해 회군 3천 명으로 남양만에 상륙했다. 8월 25일 한양에 입성한 오장경 흥선대원군을 초청해 불러놓고는 억류시켰다. 그리고는 그대로 텐진으로 배에 태워 보냈다. 8월 29일 왕십리 이태원 일대에 주둔하던 난 가담자들은 청국군의 공격을 받아 170여 명이 체포되고 11명이 사형됐다. 이렇게 8월 30일 조선 정부와 일본 제국은 제물포조약이 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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