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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단종 복위 운동 그리고 사육신과 생육신

투데이_시크릿 2022. 11. 23. 17:52

 사육신이라 함은 죽음으로 충성을 바친 여섯 명의 신하를 뜻하며 그들은 하위지, 이개, 성삼문, 김문기, 박팽년이다.

생육신이라 함은 벼슬을 버리고 절개를 지킨 여덟 명의 신하를 뜻하며 그들은 유응부, 원호, 조려, 성담수, 이맹전, 권절, 김시습, 남효온이다.

 

 사육신은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여섯 명의 신하들이다. 사육신과 생육신 등의 신하들을 통칭하여 다른 훈구파와 구별하여 따로 절의파로 부르기도 한다. 이들의 시신은 노량진 근처에 매장되어 있다. 사육신이 세조 덕종, 예종 삼부자를 연회장에서 척살할 계획으로 박쟁, 성승을 별운검으로 세조 3부자의 뒤에 세웠다가 3부자의 목을 벨 계획을 세웠으나, 거사 동조자 중 한명인 김질이 장인 정창손의 설득으로 거사를 폭로함으로써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사육신 중 하위지는 세조가 죄를 시인하면 살려주겠다고 하였으나 스스로 사양하였고 죽음을 택하였다. 사육신과 그 가족들은 본인과 아버지, 형제, 아들, 손자, 조카까지 모두 연좌되어 처형다했고, 생후 1년, 2년된 어린 남자아이는 입에 소금을 채워 질식사시키거나 나이가 찬 뒤에 처형시켰다. 백부, 숙부, 조부, 종조부, 사촌까지는 노비로 보내지거나 관노로 고을에 영속되거나 병사로 층군당했고, 5촌 이상은 유배형을 당했다. 사육신은 단종복위운동의 실패로 관련자 500~800여 명이 처형, 학살되었으며, 사육신 중 현재 하위지 박팽년만이 직계 후손이 전한다. 하위지의 조카 중 하포, 하원, 하박 등은 미성년자라서 처형되지 않았으며, 박팽년의 며느리 이씨는 자신이 낳은 아들과 박팽년가의 노비로 함께 끌려온 여종의 딸로 바꾸어서 자신의 딸이라 주장하여 아들을 살렸다. 아들 박비는 성종 때에 자수하여 특별히 사면되고 박일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 외에는 직계 후손이 끊어졌다. 그 밖에 사육신 가문의 가까운 친인척 중 살아남은 인물은 이개의 종증손이자 토정비결의 저자 이지함이고 종고손은 북인당수 이산해였다. 생육신의 한사람인 성담수가 사육신 성삼문의 6촌 동생이었다. 가장 안타까운것은 사육신 가문의 여성들은 공신들의 종과 노리개, 첩으로 분배되었으며 권영금 같은 이는 권람의 친족인 덕에 욕을 모면하였다. 

 

 사육신의 시신이 매장된 뒤 세조는 이를 보고 당대에는 역적이지만 후대에는 충신이 되겠다고 한탄한 바 있다. 한편 사육신의 편에서 세조의 편으로 전향한 김질, 정인지, 신숙주는 배신자의 상징으러 여겨져 비판과 조롱,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사육신의 사후 중종때 되서 복권의 움직임이 시작되었으며, 현종때 김수항, 송시열 등이 사육신의 복권을 청하는 상소를 계속 올려 영조, 정조 때에 관직이 복구되었고 증직과 시호가 내려졌다. 1782년(정조 6년) 정조는 박팽년, 이개, 성삼문, 하위지, 유성원, 김문기를 추모하여 노량진에 조선육신이라는 신도비를 세워주었다.

 

 생육신은 조선 제6대 왕 단종을 위하여 절의를 지킨 6인의 신하로 성삼문 집현전을 중심으로 동문수학했던 이개, 유성원, 하위지, 박팽년 등 뜻이 맞는 동지들을 규합하기 시작하였고, 김문기도 거사에 합류했다. 그러나 이들의 거사는 결국 실패로 끝났고 모두 체포되어 참수당했다. 당시 이 사건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거나 화를 입은 인물은 사육신을 비롯해 권자신, 김문기 등 70여 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단종 복위 운동에 나선 인물을 대개 사육신으로만 알고 있는 까닭은 바로 생육신으로 자처했던 인물 중의 한 사람인 남효온이 '육신전'을 저술한 것에서 비롯된다. 남효온은 자신의 문집인 '추강집'에 사육신에 관한 기록을 '육신전'으로 남겼고, 수양대군의 불법에 맞서 저항한 이들의 명성은 재야의 사림을 중심으로 널리 전파되었다. 이후 사육신 성리학의 이념인 충절과 의리가 한층 강화된 조선 후기 숙종대를 거쳐 정조대에 이르러 마침내 국가적인 공인을 받게 되었다. 즉, 1456년(세조 2년)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죽은 사육신에 대칭하여 생육신이라 하였다. 곧 조려, 남효온, 김시습, 성담수, 유응부, 이맹전, 원호를 말한다. 이들은 세조 즉위 후 관직을 그만두거나 아예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세조의 즉위를 부도덕한 찬탈행위로 규정하고 비난하며 지내다 죽었다. 중종반정 후 사림파가 등장, 사육신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나오게 되면서 이들의 절의 또한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되었다.

 

 단종복위운동이란 1454년에 수양대군이 금성대군을 비롯한 단종의 나머지 측근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 유배하는 일이 일어나자 계유정난을 계기로 일부 신료들은 단종이 양위해야 된다는 공론을 세웠고 이는 통과되었다. 1455년 7월 25일, 단종은 수양대군의 측근 세력인 권람, 한명회 등에게 선위를 강요받아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 으로 물러나 수강궁으로 옮겨갔다. 동시에 그의 유모이기도 했던 혜빈 양씨 금성대군 등과 결탁하여 전횡을 휘둘렀다는 이유로 탄핵당하고 가산이 적몰된 뒤 청풍으로 유배를 갔다가 1455년 12월 17일 신하들의 여러 상소끝에 사망한다.

1457년 음력 10월 21일의 '세조실록'에는 단종이 16세의 어린 나이로 자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중종 때까지 장례나 무덤도 제대로 못한 점으로 보아 세조실록의 기록은 거짓말이고 타살이 확실해보인다. 또한 선조실록에 기대승이 단종에게 사약을 내린 증거로, 의금부의 공사와 처형 당시 영월 주민들의 증언 기록을 내세운 것으로 보아 단종 이홍위가 사약을 받은 것은 확실해보인다. '숙종실록'에는 의금부 도사 왕방연이 단종을 찾아가 차마 아무 말도 못하자, 그를 모시고 있던 자가 그를 해하였다고 한다.  단종이 죽자 아무도 그의 시신을 매장하지 못하였으나 영권군의 호장인 엄흥도가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지를 찾던 중, 눈보라가 치던 곳에서 사슴이 앉았다가 사라진 곳을 보고 그 곳에 가매장하였다. 단종을 매장한 뒤 엄흥도는 가솔들을 이끌고 영월을 떠났다.  단종은 1457년 16세의 나이로 사약을 받고 죽은 이후 가매장되었다가, 59년 후인 중종 11년 1516년 12월 15일에야 봉분을 갖추게 되었다. 능은 영월에 있는 장릉이다.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에 소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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