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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세종대왕 이도

투데이_시크릿 2022. 11. 23. 00:34

 1397년(태조 6년) 5월 15일, 한성 준수방에서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로 당시 정안군이던 아버지 태종 이방원과 어머니 원경왕후의 여섯번째 자녀이자,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날 당시 형 양녕대군 이제, 효령대군 이보와 정순공주, 경정공주, 경안공주 등 동복 친누나 세 명이 있었다. 1408년(태종 8년), 충녕군에 봉해졌으며 같은해에 소헌왕후가 되는심온 의 딸 심씨와 혼인하였다. 어려서부터 독서와 공부를 좋아하였으며, 두 형과 함께 빈객으로 임명된 계성군 이래 변계량에게 수학하였다. 이후 정몽주의 문하생인 권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어려서부터 책을 한시도 손에 놓지 않아 눈병과 과로로 건강을 해치기도 하였다, 이에 태종은 책을 모두 감추게하여 책을 못보게하였다. 1412년(태종 12년) 효령대군과 함께 대군으로 진봉되어 충녕대군이 되었다. 충녕대군은 형제간 우애가 깊은 인물이고, 부모에게 지극한 효자로 각인되었다. 특히 친동생인 성녕대군에게는 형제 중 직접 병간호를 할만큼 우애가 각별했으나 홍역을 앓던 성녕대군은 끝내 병을 털어내지 못한 채 사망하였다.

 

 1418년(태종 18년) 6월 3일 태종은 양녕대군의 여러 가지 비행에 고심하던 중 신료들의 폐세자 주청에 대한 상소가 연이어 올라오자, 양녕대군의 행동이 지극히 무도하여 종사를 이어받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양녕대군을 폐위시키고 광주로 유배보냈다. 그 후 충녕대군을 새로운 세자로 책봉하였다. 같은 해 8월 10일 태종은 세자에게 양위하였다. 세자는 양위를 거절하였으나 태종의 지속적이며 완고함으로 인해 양위를 받아들여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하였다. 태종으로부터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으나 세종의 재위 초기에는 태종이 상왕으로서 군권과 인사권을 직접 행사하였고, 세종의 장인인 심온을 비롯한 외척세력을 숙청하였다. 이후 세종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유능한 인재를 많이 등용하여 깨끗하고 참신한 정치를 펼쳐 나갔다. 그러면서도 인사와 군사에 관한 일은 세종 자신이 직접 처리함으로써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었다. 아울러 국가의 행사를 오례에 따라 유교식으로 거행하였으며, 사대부에게도 주자가례의 시행을 장려하여 유교 윤리가 사회 윤리로 자리 잡게 만들었다. 또한 사대사고를 정비하고, '효행록', '삼강행실도' 등을 간행하여 유교를 장려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몸이 약한 데다가, 학문에만 전념하는 모습을 보여 아버지 태종에게 걱정을 샀던 세종은 젊은 시절 무리하게 국정을 돌본 탓에 집권 후반에 들어서면서 건강이 몹시 악화되었다. 각종 질병에 자주 시달려서 병석에 누워 정무를 볼 수 없게 되었고, 이러한 질병으로 인해 여러 번 세자의 섭정을 하려고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에 무산되었다. 세종은 학문을 좋아하고 육식을 즐겼기 때문에 젊은 시절 비만하여 몸집이 거대하였으나 노년에는 질병을 앓아 비쩍 말랐었다. '세종싱실록'에는 세종이 시각장애를 앓아 괴로워하는 기록이 있다. "내가 두 눈이 흐릿하고 아파서 봄부터 어두운 곳에서는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고는 걷기가 어려웠다." 등의 내용으로 세종이 시각에 장애가 있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치세 말년에 이르러 병세가 악화되어 제대로 집무를 할 수 없게 되자 문종이 대리청정을 하였다. 집권 후반부에는 이런 각종 질병을 다스리기 위하여 자주 온천에 행차하였고 불교 사원을 방문하여 불교의 힘을 빌렸다. 1446년(세종 26년) 소헌왕후가 죽은 이후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고, 1450년(세종 32년) 2월 17일 승하하였다.

 

 여진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천과 최윤덕에게 압록강 상류 지역에 4군을, 이징옥 김종서에게 두만강 하류 지역에 6진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일본과의 외교에서 초기에는 삼포 개항 등의 회유책을 썼으나 상왕 태종의 명령 아래 무력으로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사령관 이종무의 실책으로 조선의 피해가 만만치 않아 실질적으론 군사적인 승리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대마도주가 조선에 항복하여 조공할 것을 약속하였기에 부정적인 것 또한 아니었다. 1420년(세종 2년), 중앙 집권 체제를 운영하기 위해 정책 연구 기관으로 궁중 안에 집현전을 설치하였으며, 1443년(세종 25년), 세종은 백성들이 당시의 문자인 한자를 쉽게 배우지 못하며, 우리 말과 한자가 서로 통하지 않아 말하고자 하는 바를 표현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겨 친히 28개의 글자를 창제하였다. 글자의모음 은 음양의 원리를 기본으로 만들었으며 자음 오행의 원리를 기본으로 만들었다.

세종은 권진, 맹사성, 김종서, 황희 등의 재상들에게 일정 부분의 권한을 위임하여 대신 정무를 주관하게 했다. 세종은 6조의 관료들이 병권과 인사권 외의 정무를 의정부 정승들의 의결을 거쳐 왕에게 전하게 하는 의정부 서사제를 실시한다. 그런데 세종이 의정부 서사제를 실시한 표면적 이유는 건강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종이 왕권의 상당 부분을 의정부로 옮기도록 결심한 배경은 영의정이 황희였기 때문이다. 황희는 오랫동안 관직에 있었으므로 처세술에 능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야사인 '연려실기술'에는 황희가 어떤 젊은 성균관 유생으로부터 "정승이 되어서 임금의 그릇됨을 잡지 못한단 말이냐"라고 면박을 당했는데 도리어 기뻐했다고 한다. 이후 18년 동안 황희 는 명재상으로서 세종을 잘 보필하였다.세종의 또 다른 정승은 맹사성으로 그는 청렴한 관료였지만 자신의 의견이나 개성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세종은 맹사성 역시 적극 신뢰하여 황희, 권진과 함께 그를 중용하였다. 또한 세종 후반기에는 황희 등이 천거한 김종서 등을 재상으로 중용하여 정사를 맡기기도 했다. 세종은 장영실, 정초, 이천, 정인지 등에게 명하여 천문 관기구인 간의, 혼천의, 혼상, 천문 기구 겸 시계인 일성정시의, 해시계인 양부일구와 물시계인 자격루 , 누호 등 백성들의 생활과 농업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과학 기구를 발명하게 하였다. 궁중에 일종의 과학관이라 할 수 있는 흠경각을 세우고 과학 기구들을 설치하여 과학읠 발전에 크게 힘썼다. 고금의 천문도를 참작하여 새 천문도를 만들게 했으며, 김당과 이순지 등에 명해 중국의수시력 과 아라비아의 회회력등 주변국의 역법을 참고로 하여 역서인 '칠정산' 내편과 외편을 편찬하였는데, 서울을 기준으로 천체 운동을 정확하게 계산함으로써 독자적으로 역법을 계산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외에도 '금속활자와 인쇄술 발전. '도량형 통일,총통제작', '음악 정비,편경 제작', '서적 편찬', '문물 정비', '법전 정비', '형옥제도 확립', '공법 제정' 등에 힘썼으며, 백성을 사랑으로 다스리는 '애민정책'을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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