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제 1차 왕자의 난의 원인은 크게 세자 책봉 문제와 요동 정벌, 사병 혁파 등에서 시작됐다. 더욱이 붙여서 말하자면, 태종 이방원의 관점과 정도전의 관점이 충돌해서 생긴 문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태조에겐 조선을 개국하기 전에 맞이한 두 명의 정처가 있었는데, 첫번째 부인은 그가 무명 장수 시절에 고향에서 맞이한 한씨이며 다른 한 명은 군공으로 입신양명한 그가 개경에서 맞이한 강씨이다. 하지만 한씨는 조선개국전 1391년에 이미 사망했으므로 태조는 고려조 왕비를 배출하는 최고 명문 가문이자 당대 제일 권문세가의 딸이었던 강씨의 집안 배경 및 강씨의 두터운 인맥과 지모의 도움으로 개국왕으로 등극할 수 있었다. 태조는 왕으로 등극한 직후, 강씨를 왕비로 책봉하여 정비로 삼았고 그녀의 자식인 어린 두 왕자 중에서 왕세자를 간택하여 막내인 이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했다.
한씨가 추존 왕비가 된 것은 그로 1년 후의 일로, 비록 한씨가 먼저 태조에게 출가하긴 하였으나 서열상 한씨는 차비에 불과하였다. 더욱이 1396년(태조5년), 현비 강씨가 병으로 죽게되자 태조는 강씨를 추모하기 위해 왕후로 추봉하는데, 이로 인하여 이미 사망한 한씨의 서열은 명목상 후궁이 되었다.
절비한씨의 자식으로는 1남 이방우, 2남 이방과, 3남 이방의, 4남 이방간, 5남 이방원, 6남 이방연이 있었는데, 특히 이중에서 5남 이방원은 태조의 처우에 대한 불평이 대단많았다고한다. 또한 개국공신으로서 왕세자 이방석의 보도를 책임지고 있는 심효생, 남은, 정도전 등 소수 재신이 국왕과의 정치적 소통을 장악한 상황에서 일반 신료들의 불만이 커져있었다.
태조는 개국 초기부터 공신과 종친들을 절제사로 임명하여 군권을 분할했고, 재위 기간 동안 이를 회수하고자 하였다. 뒤이어 태조의 지원 아래 정도전 요동 정벌을 계획하고 사병을 혁파해 군제를 단일화하려 하자, 이방원은 이에 반발하여 조영무, 조온 등 사병을 가진 공신 및 종친들과 결탁했다.
한양 신도의 공역이 완료된 지 2년 후인 1398년(태조7년) 8월 심효생, 남은, 정도전 등이 비밀리에 모의하여 태조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이유로 여러 왕자를 궁중으로 불러들인다. 이방원은 이를 정도전 등이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죽일 계획으로 해석하였고, 이를 미연에 방지한다는 명분을 세워 10월 5일 3남 이방의, 4남 이방간 등 여러 왕자들을 포섭하였고, 이지란, 박포, 하륜, 조준, 민무질, 민무구, 이숙번 등 휘하 부하들을 시켜 군사를 일으켰다.
그 뒤 남은의 집을 습격해 정도전과 남은을 무참히 살해하였다. 같은 시각에 심효생, 이근, 장지화, 유만수, 박위를 살해하였고, 변란의 대한 책임을 왕세자 이방석과 정도전 일파에게 전가했다. 또한, 왕세자 이방석은 폐위하여 귀양 보내는 도중 살해하고, 이방석의 동복 형 이방번도 함께 죽여 버렸다. 이 변란으로 세자 이방석이 폐위되니, 다음 세자로 이방원을 만들게 된 것은 정세의 당연한 귀추였다.
이방원은 장자승계의 법칙을 따르기 위해 난을 일으킨 것으로 쿠데타를 정당화하였으며. 세자 자리를 굳이 사양하고 둘째 형인 이방과에게 넘겨주었는데, 이는 큰형인 진안대군이 이미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위에는 야심이 없고 정치적 기반이 약한 형 이방과에게 차기 제왕의 자리를 양보함으로써 아비를 치고 아우들을 살해한 주동자로써의 책임을 떠맡김과 동시에 훗날을 기약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태조는 왕세자 이방석과 무안군 이방번, 그리고 사위 흥안군 이제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한달 뒤인 9월에 이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니 그가 정종이다. 이때부터 태조는 상왕으로 칭하게 되었다. 왕으로 즉위한 정종은 즉시 생모 절비 한씨를 신의황후로 추존하여 신덕활후 강씨와 동급으로 승격시켰다.
제1차 왕자의 난은 정치적으로 보면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당대 실력자였던 정도전의 일파를 왕권에 야심이 있던 왕의 5남 이방원의 일파가 집권 세력 내 쿠데타를 통해 타도하고 권력을 차지한 사건이지만, 좀 더 협의(狹義)로 볼 때에는 이복형제 간의 왕위 쟁탈을 위한 골육상쟁이었다.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이방원은 실권을 가지게 되었고 세자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4남 이방간 또한 세자 자리를 탐내고 있었고 그로인해 결국 제2차 왕자의 난이 벌어지게 되었다.
태조가 제1차 왕자의 난의 충격으로 인해 왕위를 정종에게 내주고 떠난 뒤 정종은 수를도 다시 개경으로 옮겼다. 태조의 4남이자 이방원의 형이방간은 왕위 계승에 대한 야심과 호기가 많았으나, 인격·공훈·위세가 방원에 도저히 미치지 못하여 항상 시기하며 의심하고, 불안해하고있었다. 한편 지중추 박포는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 등이 이방원을 제거하려 한다고 밀고하는 등 방원을 도와 난을 성공적으로 수습하는 데 공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상작이 높지 못한 데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이방간이 왕위를 넘보기 시작했고, 뒤이어 박포까지 돕기로 하자 이방간은 군사를 일으켰다.
이에 이방원도 급히 군사를 동원하였고, 개경 선죽교에서 두 병력이 대치하여 전투를 시작했다. 이방간의 군대는 사조지에 군사를 멈추고 보졸 40명은 마정동 안에, 기병 20명은 전목 동구에서 나와 전투를 벌였고 이 과정에서 이방원의 휘하인 목인해가 얼굴에 화살을 맞고 김법생도 화살에 맞아 죽게되었다.
이방원은 하륜을 시켜 교서를 지은 뒤 군전에 가게 해 상당후 이저와 이화, 이맹종 등 이방원 휘하의 군사들이 모두 투입되어 이방간의 조아 이성기가 이숙번의 활에 맞아 죽고 이유, 마천목, 서익 등도 선봉에 서서 이방간의 군사를 추격해 승패는 결정되었다.
전국은 이방간의 군대에게 불리하여 패주하게 되니, 이방원의 병력은 이방간의 병력을 무찔렀으며 이방간은 묘련 북동으로 달아나다가 탄헌문 근처에서 권희달, 이광득, 고신부, 소근에게 추격당해 붙잡히고 만다.
거병 작란하여 동기를 모해했다는 죄명으로 이방간은 토산으로 유배되었고 박포는 죽주로 유배되었다가 처형되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이방원은 기반을 더욱 확실하고 단단히 다졌으며, 뿐만아니라 이방원의 왕위 계승을 촉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정종은 하륜 등의 주청으로 상왕 태조의 허락을 얻어 1400년 2월 이방원을 왕세자로 삼은 뒤 같은 해 11월에 그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는데, 그가 바로 제3대 태종이다.
요약해서 제 1차 왕자의 난은 1398년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발생한 왕자간의 싸움으로, 태조의 5남 이방원이 반란을 일으켜 반대 세력을 제거하였기 때문에 '이방원의 난'으로도 불리며, 그 외에 무인정사 라고도 불리고있다.
제 2차 왕의 난은 1400년 이방간과 이방원이 세자의 자리를 두고 싸운 것으로 제 2차 왕자의 난이 동복 형제간의 싸움이라면 제 1차 왕자의 난은 이복 형제간의 싸움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