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태종은 조선 제 3대 임금이자 태조의 5남 이방원으로 재위기간은 1400년 11월 28일 ~ 1418년 9월 9일 이다.
태종의 어머니는 태조의 정부인인 신의왕후 한씨의 다섯째 아들로 태조를 도와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웠다. 왕자 시절 받은 작호는 정안공, 정안공 이다. 이후 두번의 왕자의 난을 통해 정적인 정도전을 제거하였고 권력을 잡았으며, 동복형인 정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게 되었다.
태종은 1367년(공민왕 16년) 6월 13일 고려 함흥부 귀주에서 태어났으며, 태조의 아들들 중 유일하게 무예보다 학문을 더 조아했다고한다. 1382년(우왕 9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383년(우왕 10년) 문과에 병과 7등으로 급제하였는데 급제하였다. 1388년(우왕 15년) 태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당시 가솔들과 함께 동북면으로 피신했으며, 명나라에 파견되는 정조사의 서장관으로 이색을 따라북경에 다녀온 이후, 아버지를 도와 고려 왕조 유지 세력을 제거하였다. 특히 부하인 조영무와 함께 정몽주 제거 계획을 세운다.
1390년(공양황 2년), 밀직사대언에 임명되었다. 1392년(공양왕 4년) 3월, 태조 이성계가 황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굴러 떨어져 부상을 당했다. 이성계는 병을 핑계로 은신했는데, 어머니 신의왕후 한씨의 상으로 경기도 양평에서 시묘살이 중이던 이방원은 계모 신덕왕후 강씨의 급한 부름으로 개경으로 되돌아왔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낙마 사건을 계기로 이성계 세력을 축출하고 그간의 개혁 법령을 폐지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병문안을 빌미로 이성계의 가택을 방문하는 등 치밀함을 보인다.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에게 정몽주를 제거할 것을 강력하게권하였으나 이성계는 신의를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반대하였다.
이성계는 이방원에게 이왕이면 정몽주를 설득하여 자기 세력으로 끌일 것을 당부했다. 이에 이방원은 정몽주를 자택으로 부르자 정몽주는 정세를 엿보러 이성계의 병문안을 핑계로 방문했다. 이후 이방원은 마지막으로 정몽주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자택으로 불러들여 마주앉아 시조 한 수를 읊었다. 이때 정몽주와 이방원이 주고 받은 시조가 그 유명한 '단심가'와''하여가'이다. '단심가'와'하여가'는 청구명언, 가곡원류, 병와가곡집, 시가, 해동가 등에 실려있다.
이방원은 정몽주에게 '하여가'라는 제목으로 망하기 일보 직전인 고려 왕실을 붙잡지 말고, 서로서로 사이 좋게 새로운 왕조를 만드는데 동참하는것이 좋지 않겠냐는 내용의 시조를 읊었고, 이에 정몽주는 '단심가' 로 이방원의 권유를 거부하였다. 정몽주의 거부로 회유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방원은 무사를 보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타살하였다. 정몽주가 죽은 후에 그 자리에서 대나무가 솟았다고 하여 선죽교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훗날 이방원은 1398년 정도전을 숙청한 후 정몽주를 충절의 상징으로 현창시켜 익양부원군에 추증하고 영의정부사를 추서했다. 이는 삼봉 정도전을 깎아내리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이기도 하다는 평가도 있다.
정몽주 등을 제거함으로써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진 세력의 기반을 굳건하게 하여 새로운 왕조인 조선을 건국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1392년 이성계가 태조로 등극함에 따라 이방원은 정안군에 봉해졌다. 원래 장자로 왕세자를 세워야 하는 것이 원칙이나, 조선 개국의 중요한 논리 중 하나였던 우창비왕설에 연관된 태조의 장남인 진안대군 이방우를 제치고, 신하들은 나이와 공로를 감안해 신의왕후 소생 실질적 장남 영안군 이방과 또는 이방원을 세자로 세우라고 주청을 올렸다. 개국의 공로를 따지면 이방원이 태조의 아들 중 가장 많은 공을 세웠으나, 당시 "왕권보다 신권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국정이 안정된다"라는 신권을 주창하던 정도전은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면 신권을 주장하는 자기들을 제거할까 봐 두려워 결국 왕세자로 태조의 막내아들이자 계비 신덕왕후 강씨 소생인 의안대군 이방석을 선택하였다.
이후 이방원은 제 1차, 2차 왕자읜 난을 거쳐 1400년 2월 정종으로부터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책봉된지 9개울 만에 정종으로부터 양위를 물려받아 즉위하게되었다. 그 후 1401년 6월 12일 명나라로부터 권지고려국사가 아닌 조선 국왕으로 책봉받았다.
1417년부터 퇴위 직전까지 그는 서운관에 소장된 각종 예언 서적과 무속, 비기도참서를 혹세무민의 이유로 소각하도록 지시한다.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은 왕세자임에도 불구하고 학문 연마를 게을리하고, 자유분방한 활동을 좋아했다. 양녕대군의 스승 계성군은 태종 이방원을 찾아와 수업의 불가함을 알렸다. 양녕대군은 각지에 기생들을 궁궐로 데려오기도 했는데, 태종은 양녕대군이 데려온 기생들을 곤장을 쳐서 궁궐 밖으로 내쫓기도 했다. 양녕대군은 그럴 때마다 부왕 태종 이방원이 후궁을 많이 거느린 것을 언급하며 항변했다. 양녕대군의 폐위가 유력시되자 효령대군은 더 글공부를 열심히 한다. 그러나 양녕대군이 부왕 태종 이방원과 모후 원경왕후가 충녕대군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효령대군에게 넌지시 일러주자, 실망한 효령대군은 불가에 관심을 갖다가 후에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다.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은 눈병이 나고, 질환에 시달려 병석에 누우면서도 책을 옆에 끼고 있었다. 태종 이방원은 명하여 충녕대군이 책을 못보게 엄명을 내렸으나 충녕대군은 몰래 책을 숨겨놓고 병석에서도 책을 읽었다. 또한 병석에 누운 동생 성녕대군을 간호하는 모습이 태종에 눈에 들기도 했다. 1418년 태종은 양녕대군이 하루 종일 방탕한 생활만 일삼는다는 이유를 들어 왕세자에서 폐위할 것을 결심한다. 아내인 원경왕후와 상의 끝에 양녕을 폐세자 하기로 하자 신하들은 찬성하였고, 황희 등 소수만이 반대하였다. 6월, 태종은 양녕대군을 왕세자에서 폐위하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양녕대군 폐위에 반발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되는 그의 장인 김한로 역시 외지로 유배보내었다.
1418년 8월 10일 태종 이방원은 옥새를 왕세자인 충녕대군에게 넘긴 후 수정궁으로 물러났다. 충녕대군의 양위를 거두어달라는 청을 거절함으로써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재위한 지 17년 10개월 만이였다. 그러나 상왕이 된 후에도 그는 약 4년간 줄곧 국정을 관리감독하였고, 인사권과 병권을 장악하였다. 1418년 11월 8일 '성덕신공상왕'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1419년에는 둘째형인 정종이 사망했는데, '정종실록'은 태종 이방원이 생전에 간행되지 못하고 태종 이방원이 죽은 뒤에 편찬, 간행되었다. 왕권을 물려준 태종 이방원은 줄곧 세종의 왕권 안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태종은 며느리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 등 외척세력을 숙청할 계획을 세웠다. 병조참판 강상인이 정무를 자신에게 보고하지 않고 세종에게 보고한 것을 빌미 삼아 그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고, 심온을 영의정부사에 임명한 뒤 명나라에 사신으로 보내었다. 그는 국문을 친히 주관하며 강상인에게서 심온의 이름이 거론되게 하였고, 심온이 돌아오기 전 강상인과 박습, 이관, 심정 등을 처형한다. 대질심문할 용의자나 증인도 없는 상태에서 심온은 사사되었다. 이후 소헌왕후가 역적의 딸이라는 이유로 폐출해야 된다는 주장이 나타났으나 아들인 세종 이도의 간청과 애원으로 소헌왕후에 관한 폐출 이야기를 그만두었다. 1421년 9월 7일 의정부에서 이미 상왕이었던 태종의 휘호를 올릴 것을 청하여, 개국의 공을 인정받아 태상왕으로 진봉되어 9월 12일 '성덕신공태상왕'으로 존숭되었다. 7개월 후인 1422년 4월, 화창한 날씨에 세종과 함께 철원의 고석정 근처에서 사냥을 하며 노루와 멧돼지를 한 마리씩 잡았고, 또 22일에는 다시 세종과 동교에서 매사냥을 하다가 낙천정에서 쉬기도 하였는데, 이 날 태종 이방원은 환궁하였다가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리고 보름이 넘게 병석에 있다가 1422년 5월 10일, 천달방 신궁에서 세종, 양녕대군, 효령대군 등 아들들과 후궁 및 그 자식들, 그리고 신하들이 애통해 하는 가운데 56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태종 이방원의 업적으로는 '사병 혁파와 법렵 재정', '관제 개정과 신문고 설치', '공식 숙청', '서적 간행'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