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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와 제 1차, 2차 왕자의 난을 치루고 3대 왕이 된 이방원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조용했던 조선 2대왕 정종에 대해 알아보도록하자. 조선 2대 왕으로 이름은 이방과이다. 재위기간은 1398년 9월 5일 ~ 1400년 11월 13일 약 2년정도이다
정종은 1357년 (공민왕 6년) 7월 18일에 태조 이성계와 안천부원군 한경의 딸, 신의왕후 한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성품이 온화하며 용맹하고 지략이 뛰어나 태조 이성계를 도와 여러 전쟁터에 참여하여 왜구를 토벌하는 등 공적을 세웠다. 충정왕 시기부터 본격화 된 왜구의 침입은 우왕 시대의 14년동안 378회를 침입할 정도로 절정에 달해있었다.
이 시기 정종(이방과)은 1377년 5월 이성계를 수행하여 지리산까지 노략질하기 위해 진출한 왜구를 토벌하는데 일조하였으며, 기록으로는 이때부터 1398년까지 약 21년 동안을 왜구토벌을 위해 전재터를 누볐다고 한다.
이성계를 따라 왜구를 토벌한 공로로 정종은 추충여절익위공신에 책록되었고, 봉익대부 지밀직사 겸 군부판서, 응양군상호군을 역임하였다.
1392년 (태조1년), 아버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정종은 영안군으로 책봉되었으며, 태조의 친위부대인 의흥친군위 절제사에 임명되었다.
조선개국 초기의 혼란한 상황은 계속되어 아래로는 왜구가 계속해서 노략질을하고 있었고, 위로는 명나라로부터의 강한 압박이 계속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영안군 이방과는 1393년에 영녕현, 문화현의 두 현으로 출군하여 왜구를 물리쳐 공훈을 세웠다.
1395년(태조3년),태조는 의흥삼군부를 개편하고 여기에 10위를 중, 좌, 우의 3군으로 나누고 각 군마다 종친, 대신들을 절제사로 임명하였는데 영안군 이방과는 중군절제사로 임명되었다. 이로써 영안군 이방과는 병권에 관여케 되었고 요동 공격을 위한 훈련을 하게 된 것이다. 사실 이는 성석용, 정도전, 남은 등이 국내의 정세를 안정시키고 명나라로부터의 압박을 물리치기 위해 요동을 정복할 것을 청한 데에서 나온 조치였다.
1398년 8월 (태조6년), 동생 정안군(이방원)이 제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본래 왕위에 뜻이 없었던 영안군은 왕세자가 되기를 극구 사양하였으나, 태조의 장자 진안대군은 이미 사망하였기 때문에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이후 1개월 뒤인 1398년 음력 9월, 태조의 양위로 경복궁 근정전에서 조선 제2대 국왕으로 등극하였다.
정종은 1377년 (우왕3년)부터 21년 동안 전쟁터를 누빈 군인 출신이며, 일찍이 정안군(이방원)이 창업 대의에 가장 열정적이었던 것을 인정하였다. 또한 직접적으로 동생 정안군(태종)이 왕위에 오를 것을 추천하는 등 왕위에 관한 관심은 없었다고 전해진다.
정종이 사망한 뒤 국상을 치를 때에도 왕의 국상은 후대왕이 상주가 되어야하는 원칙에서 벗어나 왕위계승자인 정안군(이방원)이 아닌 장자인 의평군 이원생이 대리상주가 되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바로 온인 공용 순효 대왕이라는 시호를 올렸고 순효대왕이라고 불렀다가 명나라에서 공정이라는 시호를 올려 가져오자 공 자가 두번 들어간다고 시호에서 공용 두 글자를 빼버렸다. 이때부터는 묘효 없이 공정 온인 순효 대왕, 짧게 공정대왕이라고 불렸다.
정종이라는 묘호는 사후 250여년 후인 1681년(숙종7년), 제6대 단종과 함께 정해졌다. 정종의 의미는 태조의 업적을 계승하여 정국을 잘 다스렸으며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크게 염려하였다'는 뜻이다.
정종의 업적으로는 1399년(정종1년) 3월에 한양에서 개성으로 천도하였고, 집현전을 설치하여 경적의 강론을 담당케 하였다. 5월에는 태조 때 완성된 향약제생집성방을 시행하였으며, 8월에는 분경금지법을 제정하여 관인들이 권세가에 청탁하는 것을 방지하여 정·경 분리를 하였다. 11월에는 법전을 정비하기 위하여 조례상정도감을 설치하였다.
1400년(정종2년) 2월 제 2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정안공(이방원)을 왕세자로 책봉하였으며, 4월에는 사병을 혁파하여 군사권을 의흥삼군부로 집중시켰다. 또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중추원을 삼군부와 승정원으로 분리 및 개편하였다. 6월에는 노비변정도감을 설치함으로써 고려 말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양인으로 원복시켜줬다.
정종은 왕자의 난을 이유로 수도를 한성에서 개경으로 옮겼으나 다음 해인 1400년(정종2년) 제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동생 정안공(이방원)을 왕세자로 책봉하고 9개월 뒤 11월 13일 왕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맏형으로서 남아있는 형제들간의 반복을 일소하고 정치를 안정시키기 위한 선택으로 재위중에는 형제간의 친목에 많은 관심을 보일정도로 형제애가 남달랐다. 재위중 삼성이 회안대군을 탄핵하기 위해 논의하려 할 때, 친동생의 형의 정으로 논의를 미연에 차단 시켰다. 이후 상왕으로 물러난 정종은 인덕궁에서 거주하면서 사냥과 연회, 온천여행, 격구 등으로 편하게 세월을 보내다가 1419년(세종1년) 9월 63세의 나이로 승하하게 된다.
성은 이(李), 초명은 방과(芳果), 휘는 경(曔), 본관은 전주, 자는 광원(光遠)이다. 선양한 뒤에는 동생 태종이 인문공예 상왕으로 존호를 올렸고, 사후 조선 중후기까지 시호인 공정대왕으로 불리다가 숙종 때 정식으로 묘호와 시호를 올려 정종 공정의문장무온인수효대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