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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조선시대 4대 사화

투데이_시크릿 2022. 11. 23. 17:17

 사화는 선비들이 정치적 반대파에게 화를 입는 일을 가리키며, 한국사에서는 특히 조선 중기에 사림 세력이 화를 당한 연산군 때부터 명종 즉위년까지 발생한 5차례의 옥사를 말한다. 사화는 1498년(연산군 4년)의 무오사화, 1504년(연산군 10년)의 갑자사화, 1519년(중종 14년)의 기묘사화, 1545년(명종 즉위년)의 을사사화(4화비숙청사건)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를 ‘4대 사화’라고 부른다. 성종 때부터 중앙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사림 세력은 훈구 세력의 비리를 규탄하면서 점차 정치적 영향력이 커져갔다. 그러던 중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훈구 세력의 불만이 폭발하였고, 양 세력간의 갈등으로 사화가 발생하게 된다. 사화는 사림 세력의 역사적 성장이라는 추세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이를 통해서 사림들은 많은 피해를 입기는 하였으나 지방의 서원이 향약을 기반으로 지지기반을 확산하는 등 성장을 계속하여 선조 이르면서 중앙 정계의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며, 이후 사림 정치를 주도하였다. 4대 사화는 아래와 같다.

 

 무오사화는 1498년(연산군 4년) 7월 훈구파 사림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한 사건이다.사화가 일어난 1498년 무오년이기에 "무오사화"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사초가 원인이 되었다하여 무오사화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4대사화 가운데 첫 번째 사화이다. 15세기 후반, 성종이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를 중용하자, 훈구파는 조정에 대거 진출한 사림파와 갈등하게 되었다. 그러던중 훈구파는 성종실록 편찬에 원고가 된 사초 중에 '조의제문'의 불충함을 명분으로하여 연산군의 지원속에 사화를 일으켰다.  '조의제문'은 지난 계유정란때 있었던 세조의 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이었기에 격노한 세조의 손자 연산군은 관례를 깨고 사초를 근거로 사림파를 대거 숙청하였다. 무오사화 이후 사림파의 기세는 크게 위축되었고 견제세력이 사라진 조정은 다시 훈구파의 독무대가 되었다.

 

 갑자사화는 1504년(연산군 10년)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윤씨 복위 문제로 인하여 일어난 사화이다. 연산군 폐비 윤씨의 복위를 추진하면서 성종때 폐비를 찬성한 훈구 원로세력이 대부분 숙청당했다. 이때 희생된 사람들은 중종반정 직후 대부분 복권된다.

 

 기묘사화는 1519년(중종 14년) 11월에 조선에서 심정, 남곤, 김전, 홍경주, 중종 등 신진사림의 핵심인물들을 몰아내어 죽이거나 혹은 귀양보낸 사건이다. 조광조 등의 세력 확장과 위훈 삭제에 대한 불만이 원인 중 하나였다. 신진 사림파의 급진적인 개혁정책 역시 그들을 지지하던 안당, 정광필 등의 반감을 사면서 지원받지 못하였다. 남곤, 김전, 홍경주, 심정, 고형산 등은 후궁과 궐내 세력을 이용하여 조광조 일파의 제거 여론을 조성하여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이때 희생된 인물들은 후일 기묘명현으로 부른다. 중종은 당시 승지들도 모르게 대소신료에게 갑자기 입궐명령을 내렸고, 안당, 심정, 정광필, 남곤, 김전, 홍경주 등은 갑자기 소환명령을 받고 경복궁의 북쪽 문이었던 신무문을 통해 들어와 승지들 모르게 회의를 열었다. 일명 북문지화라고도 부른다.

 

 기묘사화가 있은 지 10년 뒤에 중종은 훈구 대신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다시 사림을 등용했으나, 1545년에 명종이 즉위하면서 일어난 소위 을사사화에 또다시 밀려나는 네 번째 화를 입었다. 이 사건은 외척간의 권력싸움에서 빚어진 것이 다른 사화와 다르다. 즉 중종이 승하하자, 첫째 계비의 소생인 인종이 즉위하고 왕비의 동생인 대윤 윤임이 세력을 떨쳤으나,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타계하자 둘째 계비인 문정왕후의 소생인 명종이 왕위에 올랐다. 명종 역시 어린 관계로 왕후가 수렴청정하고 동생인 소윤 윤원형 일파가 실권을 장악했는데, 집권하자마자 전 왕의 외척인 윤임 일파를 몰아낸 것이다. 

 

 이렇게 4개의 사화를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라고 한다. 이 외에 '정미사화', '신임사화'가 있다.

 

  봉성군이 유배를 떠나고 1년이 지난 1547년(명종 2년) 9월 18일, 부제학 정언각 한강 이남의 양재역에서 한 장의 익명서를 발견하고 이를 명종에게 고하였다. 당시 익명서에는 '여주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간하고 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중추월 그믐날.'이라는 내용이 붉은 글씨로 쓰여 있었다. 이른바 양재역 벽서 사건이며, 을사사화의 여파로 일어난 사화로 정미사화라고 칭하기도 한다. 당시 이 사건은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파가 사림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해 윤원형 일파는 애초에 윤임 등의 역모를 다스릴 때에 그 처벌을 가벼이 했기 때문이라고 간하고, 이어 윤임 일파는 물론이고 봉성군에 대해서도 모조리 죽일 것을 간하였다. 이때 명종은 계림군에 대해서만 사사를 명하였는데, 당시 이 사건을 '실록'에 기록한 사관은 이기 일파가 윤임 일파를 역적으로 몰아버리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봉성군마저 죽일 것을 간한 것은 너무 심한 처사라며 비판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봉성군을 죽이라는 상소는 계속되었으나, 명종은 전혀 윤허하지 않았다.

한편 당시 홍문관에 재직 중이던 이황도 봉성군을 죽이라는 차자를 올렸다고 그 제자가 증언하였다

 

 신임사화는 경종 즉위 1년 후인 1721년부터 다음 해인 1722년까지 당파인 노론과 소론이 연잉군의 왕세자 책봉문제로 충돌한 사건이다. 

 

 사화 이외에도 옥사, 환국. 박해 등의 사건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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