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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초대 국왕으로 이름은 주몽, 묘호는 태조이다. 동명성왕 또는 추모왕으로 불린다. 기원전 58년 출생하였으며 기원전 19년 서거하였다. 재위기간은 기원전 37년부터 기원전 19년으로 18년의 재위기간을 보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동명왕편'은 주몽의 탄생 설화를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현재 전해지는 주몽 설화는 고구려가 부여를 병합하여서 인지 부여의 시조인 동명왕의 설화와 고구려의 건국설화가 비슷함을 보인다. 역사학계에서는 부여의 동명왕과 고구려의 주몽을 다른 인물로 여긴다. 고주몽은 햇빛에 의한 회임이라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데 선비족을 통합한 단석괴도 햇빛에 의한 회임이라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는 해모수가 주몽의 아버지로 등장한다. 해모수의 '해'는 태양을 뜻한다. 즉, 천손을 의미한다. 따라서 해모수는 고구려의 천손의식이 의인화 된 결과물로 해석할수도 있다. 강을 다스리는 신 하백의 세명의 딸 유화 · 훤화 · 위화가 더위를 피하여 압록강의 웅심연에서 놀고 있었다. 이때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오룡거를 타고 내려오다가 연못 안에 세 처녀 아름다운 모습에 반하였다. 훤화 · 위화는 돌아갔으나 첫째 유화는 해모수와 만나게 되었다. 하백이 이러한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였다. 하백은 천제의 아들이라는 해모수와 술법을 겨루어 그의 능력을 시험해 본 뒤, 그의 능력에 놀라 해모수와 유화의 결혼을 인정하여 유화를 하늘나라로 보내주었으나, 여전히 해모수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아니하였던 하백은 꾀를 써서 해모수를 다시 시험해보기로 하였다. 가죽부대에 들어 있던 해모수를 주머니에 묶어 가둔 뒤에 올려보내었으나, 물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술에 깨버린 해모수가 크게 노하여 홀로 승천하였다. 이에 하백은 유화에게 크게 노하여 귀양을 보냈다. 이후 동부여의 왕 금와왕이 우연히 우발수로 나들이를 갔다가 유화를 만나고, 그 처지를 불쌍히 여긴 금와왕은 유화를 궁궐로 데려왔다. 그런데 그녀를 향하여 햇빛이 계속해서 비치는 기이한 일이 계속되더니, 마침내 그녀는 잉태하였다. 하지만 유화가 커다란 알을 낳자, 이 소식을 들은 금와왕은 이를 불길한 징조로 여기어 유화로부터 알을 빼앗아 돼지우리에 던져 버렸다. 그러나 돼지들은 이 알을 먹지 않았을 뿐더러 도리어 소중히 하였다. 그 뒤 금와는 소와 말이 짓밟도록 알을 길가에 버리기도 하였는데, 소와 말들이 알을 피해가자, 이번에는 새들이 쪼아 먹도록 들판에 놓아 두었다. 하지만 새들은 오히려 알을 품어 주었다. 때문에 금와는 도끼로 알을 내리쳐보기도 했지만 알은 온전하였다. 금와왕은 하는 수 없이 유화에게 알을 돌려주었다. 유화는 그 알을 따뜻하게 덮어주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내아이 하나가 알을 깨고 나왔다. 그 아이는 날 때부터 보통 아이들과는 달라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었으며 활로 파리를 쏘아 맞힐 정도로 대단한 재능을 타고 났다고한다. 이에 이 아이의 이름을 부여 말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인 '주몽'이라고 지었다. 주몽은 대소 왕자 등 금와왕의 7명의 아들보다 능력이 월등히 출중하여 그들의 시기를 받았고, 7명의 아들들은 호시탐탐 주몽을 죽이려 하였다. 대소가 주몽을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눈치챈 유화는 주몽에게 동부여를 떠나라고 권고하였다. 어머니의 권고에 따라 주몽은 협보, 마리, 오이 등 세 친구와 함께 동부여를 떠나 추격자들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 엄리대수에 이르렀다. 자신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엄리대수를 향해 주몽은 '나는 천제의 손자이며, 강의 신의 외손자이다. 지금 나를 쫓는 자가 뒤를 따르니 그 위험이 급한 데 강을 건널 수 없으니 도와 달라.'라고 외치니, 이에 감응한 물고기와 자라가 물 위로 떠올라 띠를 이어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주몽이 무사히 강을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는 다시 돌아가 버렸고, 추격자들은 강을 건너지 못해 더이상 쫓아오지 못했다 하는데, 이 사건을 가리켜 '어별성교'라 일컫는다.
대소의 위협에서 무사히 벗어난 주몽은 유유히 남쪽으로 향하여 마침내 졸본에 정착하여 졸본의 둘째 딸 '소서노'와 결혼하여 점차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다. 기원전 37년, 주몽은 졸본 부여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를 건국했다. '고'씨로 전해지지만 주몽의 원래 성씨는 아버지인 해모수에 따른'해'씨이며, 고구려 태조왕 당시 계루부 고씨가 집권하자 정통성을 위해 시조인 주몽의 성씨를 '고'씨로 바꾸었다. 그리고 국가의 위상을 일신하기 위해 대대적인 영토확장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주몽은 영토확장을 위해서는 우선 변방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변방에 살고 있던 말갈족 부락을 평정하여 말갈족이 더이상 국경을 넘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한 기원전 36년에는 비류수 상류에 있던 비류국의 왕 송양에게 활쏘기 경쟁으로 이겨서 항복을 받아내어 ‘옛 땅을 회복했다.’라는 뜻의 고구려말인 다물로 개칭하고, 송양을 그곳의 도주로 삼았다. 비류국을 정복한 주몽은 기원전 34년 마침내 졸본성과 궁궐을 완성하여 나라의 위상을 한층 높였다. 기원전 32년에는 오이와 부분노를 보내 백두산 동남쪽에 있던 행인국을 정복하였으며, 기원전 28년에는 부위염을 보내 북옥저를 정복하였다. 기원전 24년 가을 음력 8월에 부여에 남아있던 주몽의 어머니 유화가 죽었다. 기원전 19년 주몽이 서거하게 되었고, 고유리는 고구려의 제 2대왕인 유리명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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