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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제 15대 왕이자 광해군 이휘는 1575년에 태어났으며 선조와 공빈 김씨의 서차남으로 위로는 친형 임해군 이진이 있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광해군에 봉해졌다. 어려서 생모 공빈 김씨를 여의고 부왕의 차가운 냉대 속에서 자랐다. 외할아버지인 김희철마저도 임진왜란 중에 전사하면서 그가 기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선조에게 적자가 없는 데다, 서장남인 임해군이 포악하고 인망이 없어 서차남이었던 광해군이 임진년 1592년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야사에 의하면, 선조가 아들들을 불러 '가장 맛있는 음식이 무엇이냐?'라고 물었고, 다른 왕자들은 각기 다른 대답을 하였지만, 광해군은 소금이라 대답하여 세자로 책봉되었다고 한다. 1591년(선조 24년) 종계변무가 성사되자 기뻐했던 부왕 선조는 왕자들도 특별히 광국원종공신 1등에 책록하여 원종공신록에 넣는다. 광해군도 이때 친형 임해군 진, 이복동생 신성군 후, 정원군 부, 순화군 보 등과 함께 광국원종공신 1등에 특별히 책록되었다.
선조의 정비 인의왕후가 자식을 낳지 못하자, 어쩔 수 없이 서자들 중에서 왕세자를 선택해야 했지만 그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선조는 후궁 인빈 김씨를 가장 총애했기에 그녀의 아들인 신성군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선조에게는 장성한 여러 왕자들이 있었으나 임해군, 정원군, 순화군 등은 성격이 너무 흉폭하여 불가하였고, 자질로 따지자면 광해군이 가장 유력했다. 그러나 방계승통에 서얼이라는 열등감이 있었던 선조는 광해군이 정비에게서 나온 적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세자 책봉을 계속해서 미루었다. 1591년, 선조의 나이가 어느덧 40세에 이르자 대신들은 더 이상 후계문제를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하여 세자책봉 문제를 논의했다. 논의 끝에 영의정 이산해, 우의정 류성룡, 좌의정 정철 등은 함께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주청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동인의 영수 이산해는 이를 이용해 계략을 꾸몄다. 선조가 신성군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았던 이산해는 이번기회에 지난번 기축옥사(1589)로 동인들이 당한것에 대한 보복과 더불어 정철과 서인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고자 했다. 이산해는 광해군의 세자 책봉에 동의 한 뒤, 인빈 김씨의 오빠 김공량에게는 서인들이 신성군을 죽이려 한다고 은밀히 전했다. 이런 사실을 선조는 인빈 김씨를 통해 전해 듣게 되었다. 또한 이산해는 병을 핑계삼아 주청을 하기로한 날에 경연에 불참하였다. 이산해가 계략을 꾸미는 줄도 모르고 정철은 경연중에 선조에게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건의했다. 선조는 진노하며 정철을 파직시키고 유배를 보내버렸다. 이후 류성룡을 좌의정으로 올리고 서인을 멀리하며 동인들을 가까이 두었다. 선조가 정철과 서인의 처결문제를 동인들과 의논을 할때에 동인들은 의견이 갈려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게 되었다. 남인들은 온건한 처결을 주장했으나, 북인들은 강경한 입장을 표방했다. 지난 정여립의 모반사건 때 정철 등 서인들에게 크게 화를 입은 동인들이 북인 붕당을 형성했는데, 이들은 이번 기회에 복수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기축옥사때 서인들이 동인을 누르고 집권했었으나 이번 일로 인해 동인들이 다시 득세하였다. 이후 세자책봉 문제는 거론할 수 없는 금기사항이 되었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갑자기 발발하면서 세자 책봉 문제가 거론되지 못했다. 그러나 신성군이 피난길에 죽고 분조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선조는 6월에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은 성격이 광포하고 인망이 없다는 이유로 세자 책봉에서 제외되었다. 광해군은 전쟁 중에 평양에서 세자로 책봉된 뒤 선조가 피난을 가고 없는 궁을 지키면서 전란을 수습 했다. 평안도, 함경도, 강원도 등지에서 군수품과 의병을 직접 모집하는 한편, 민심을 위무하고 군량미를 모아 민중들의 신망과 지지를 받기도 했다. 또한, 부왕의 정비인 인의왕후의 양자가 되어 세자로서의 위치를 표면상 굳히게 되었다. 그러나 명나라는 적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세자책봉 승인을 거부하였고, 부왕 선조는 광해군을 심하게 경계하였다. 1598년 임진왜란은 종전되었지만, 신성군, 정원군 등을 호성공신에 추가 수록한 데 반해 광해군에 관한 포상은 어떤 기록에 없다.
1600년에 인의왕후가 죽은후 1602년에 인목왕후가 선조의 계비가 되었다. 1606년, 그녀가 영창대군을 낳자, 부왕 선조는 광해군을 폐하고 적자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다. 선조 자신이 서얼인데다가 방계승통을 했다는 열등감으로 인해 정국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때에 18세의 나이로 세자가 되어 분조를 이끌며 고군분투하여 내외의 신망을 두텁게 쌓은 광해군을 폐하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명나라는 지난 1604년(선조 37년) 11월에 광해군에 대한 세자승인 거부 의사를 거듭 밝히기도 했다. 또한 임진왜란을 거치며 정권을 잡은 북인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유영경 등은 적통론과 광해군이 명나라의 고명을 받지 못했다는 점을 앞세워 영창대군 옹립을 지지하며 소북파를 이루었고, 정인홍 등을 중심으로한 대북파는 광해군을 끝까지 지지하였다. 1608년 지병이 악화된 선조는 영창대군이 너무 어린점을 들어 광해군에게 왕위를 계승시킨다는 교서를 내렸다. 그러나 유영경이 이 교서를 자기집에 몰래 감추었다가 후에 발각되었다. 대신들이 유영경의 처벌을 강력하게 주청하였으나 미처 처결을 결정하지 못한채로 선조가 갑자기 사망해버렸다. 독살설이 나돌기는 했지만 이는 인조반정후 반정세력이 퍼뜨린 것으로 독살에 대한 확실한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선조가 죽자 왕위계승 결정권은 인목왕후에게 넘어가게 된다. 유영경이 영창대군을 즉위시킨후 수렴청정 할 것을 청하였으나 인목왕후는 현실성이 너무 없다고 판단하에 광해군을 즉위시킨다는 한글교서를 내렸다. 1608년 음력 2월 2일, 광해군은 34살에 왕위를 올랐다.
1608년 즉위한 광해군은 이후 생모인 공빈 김씨를 공성왕후로 추존하였다. 유영경의 세자 교체 기도에 대해 적극 반대하고 나섰던 대북파의 이산해, 정인홍, 이이첨 등은 광해군이 즉위함에 따라 광해군을 정통으로 지지한 공로로 중용되었다. 즉위 초 광해군은 당쟁의 폐해를 알고 억제하려 하였다. 남인인 영의정 이원익을 포함하여 북인에게 밀린 남인계 인사들과 서인계 인사들을 일부 등용하고, 소북파를 대북파 못지않게 대우하는 등 초기에는 당쟁을 수습하려고 크게 노력하였으나 대북파의 강한 반발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영창대군을 지지했던 유영경은 잇다른 탄핵으로 처형되었고, 소북파는 대북파의 견제를 끊임없이 받으며 조금씩 조금씩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산림 숭용 정책을 추진하고 재야의 선비들을 채용하려 하였으나 정인홍, 곽재우 모두 고사하거나 취임 후 사직 상소를 한 후 내려가 실패하였다. 그러나 정인홍은 뒤에 그의 권고를 받아들여 관직에 올라 북인 정권의 막후 실력자가 된다.
1609년 광해군은 친형인 임해군을 교동으로 유배시켰고 그 후 죽였다. 1612년 김직재의 옥과 1613년 계축옥사가 발생하자 영창대군을 추대하여 역모를 꾀했다는 혐의로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을 죽였다. 이 과정에서 광해군과 북인은 인목왕후의 인의왕후 능 저주설을 조작하기도 하였다. 김제남은 죽은 지 3년 만에 다시 부관참시되었으며 그 일족 또한 막내아들과 부인을 제외한 세 아들이 화를 당하였다. 임해군은 자신의 왕권 강화에 걸림돌이 되었다고는 하나, 광해군 자신의 유일한 친형제였고, 투명하지 못한 살해 과정으로 일부 신료들에게 의구심을 주기도 하였다. 1614년 광해군은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유배하였다가 얼마 후 방 안에 가두고 장작불을 지펴 죽였다. 1615년 훗날 인조가 되는 능양군의 동생인 능창군까지 폐서인하여 교동에 안치해버리고, 결국 목을 매어 자살하게 하는 등 왕권을 위협하는 모든 세력을 제거하였다. 이런 처결은 나중에 서인에게 반정의 명분이 되었다. 광해군과 이이첨 일당은 영창대군 살해 시점 직후부터, 각종 조작설과 허균 등을 비롯한 강경파 관료, 유생들을 동원한 상소 다발들을 펼치며 끊임없이 인목대비 폐비 공작을 전개하였다. 결국 인목대비를 1618년 폐비시켜 서궁에 유폐시켰다. 이 사건으로 정국은 들끓었으며,인조반정의 결정적인 명분이 된다.
1623년 3월 14일 새벽, 서인들의 주도와 남인들의 동조로 인조반정이 발생하게 된다. 이괄, 최명길, 김자점, 김류, 이귀 등과 정원군의 장남 능양군은 군사를 동원하여 궁궐을 장악했다. 이들은 광해군을 인목왕후 앞으로 끌고 갔는데, 인목왕후는 광해군과 폐세자에 대한 처형을 주장하였으나, 인조와 반정 세력은 반정의 명분인 폐모살제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유배를 보내는 선에서 반정을 마무리 짓게 된다. 그 후 반정군에게 김개시, 이이첨, 정인홍 등은 죽고, 40여 명의 관리가 구금된다.
광해군은 폐위 후 폐비 유씨, 그리고 폐세자 지와 폐사자빈 박씨와 함께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고, 울타리에 갇혀 살기 시작한 지 두 달 후인 5월 폐세자와 폐세자빈은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게되었고 결국 자결하게 된다. 그때 폐세자는 다리미와 큰 가위를 이용해서 울타리 밑에 땅굴을 파고 도주를 시도하다가 발각되었고, 인조는 그 소식을 듣고 한 달 뒤인 6월 사촌동생인 폐세자에게 자진을 명하고, 폐세자 질은 그 명에 따라 자진한다. 한편 폐세자빈 박씨는 남편이 잡히는 것을 보고는 나무에서 떨어져 정신을 잃었다가 사흘 후 깨어났고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그해 10월에 부인 유씨도 사망하는데, 유배 생활 중의 화병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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