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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전반을 중심으로 하는 시기의 문화를 말한다. 7세기 후반의 백봉 문화에 선행한다.
조선을 경유하여 남북조문화의 적극적 수용이 이루어진 곳에 선행 및 후속하는 시기의 문화와 다른 최대의 특색이 발견되기 때문에 대륙문화와의 관계에서 먼저 봐야 한다.
동아시아 속에서의 아사카 문화
이미 5세기 말부터 백제는 고구려의 남진에 처해 후퇴를 계속해 6세기 전반까지 수도를 위례에서 웅진으로 옮기는 것을 강요당했다.
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백제는 한편으로 남북에 입공하여 중국의 환심을 찾아 불교·유학·음양도·의학·조형미술 등의 중국문화를 배우고 있었지만 한편 일본의 정치적 원조를 요구하기 위한 반대 급부로서 자꾸 이들을 일본에 재수출했다.
6세기 후반의 일본에 백제부터 오경박사, 의사박사, 달력박사, 불교, 조불공, 조사공, 불상 등이 공상된 것은 그러한 사정에 의한 것이었다.
또한 고구려도 진흥왕 이래 세력을 강화한 신라로부터 그 영토를 침범당하고, 광개토왕 시대 이후 한반도에서 패권을 다투고 있던 일본과의 관계를 바꿀 필요를 느끼게 되어 570년 에는 일본에 사를 보내,
쓰시마 해협을 경유한 백제와의 교통로 외에, 새롭게 일본해를 통해 일본과 고구려를 잇는 국제교통로가 열리게 되었다. 아스카 문화는 이러한 6세기 동아시아 문화전송코스의 형성을 역사적 전제로 성립한 것이다.
다만 6세기까지의 대륙문화의 이식은 오로지 외국 측에서 전해지는 것을 받아들이는 수동적 자세로 진행된 반면, 7세기에는 일본에서 나아가 대륙문화를 적극 수입 하려고 하는 자각이 밝혀지게 된다.
『수서』에 의하면, 추고 천황 15년에 해당하는 607년에 일본의 사인이 능에 보내져, 능의 황제가 불법을 흥했다고 듣고 특히 보내져 온 취지를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당시 일본 정부가 수련의 불교문화를 배우는 목적으로 견학사를 파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서기』는, 이 해 및 그 다음 해, 오노 여동생이 병수사로서 능에 건너간 것을 기록해, 608년 때에는, 고향 한인 현리 (타카무이 아야히토겐리) 등 사람의 학생 (가쿠쇼) 과 신한인 일문(이마키노 아야히니치몬) 등 4명의 학문승이 유학생으로서 보내진 것을 기록하고 있다.
기존의 한반도 경유의 문화이식 외에도 새롭게 대륙과의 직접적인 문화이식로가 열렸다. 신라의 세력 발전에 빠진 백제는 잇따라 일본과의 관계를 조밀하게 하기 위해 7세기 이후에도 자주 문화를 일본에 전하고 고구려도 중국의 통일에 의해 위협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에의 문화 수출을 적극적으로해 왔다. 이와 같은 대륙·한반도와의 문화적 교통이 아스카 문화의 내용을 전대에 비해 현저하고 새롭게 하는데 힘이 있었던 것이다.
중국 통일 왕조의 문화의 영향이 농후하게 나타나는 것은 다음의 백봉 문화 이후이며, 이 시기까지는 유일하게 남북조 문화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어쨌든 대륙 문화를 계수 하고 전대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문화가 전개되어 아스카 문화라고 불리는 일시기를 문화사상에 획한 것이다.
아스카 문화의 주된 내용
이 시기에 있어서도 일본의 전통적 문화가 널리 유지되고 있어 오히려 그것이 외연적으로는 가장 지배적이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 점에서는 특히 아스카 문화에 한정해 특색짓는 것만 시대적 독자성을 추구하는 것은 어렵고, 아스카 문화의 독특한 내용으로는, 앞서 말한 국제적 정세에 근거해 계승된 대륙적 신문화의 개화에 주목해야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은 불교문화이다. 당시 불교는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이른바 대륙문화를 응집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불교는 이미 6세기 이래, 소가씨를 주로 없는 손으로 받아들여져 백제로부터 공상된 기술자의 힘을 받아 7세기 초에 아스카사의 조영이 진행되어 가 각지에 속속 건립되었지만, 이 시대의 사원은 전술한 불교의 본연의 방법에 따라, 신앙을 위한 전당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대륙풍의 새로운 건축·조각·회화·음악 등의 문화를 형상적으로 표현하는 곳에 가장 큰 역사적 역할이 있었던 것 같다.
이들은 아스카지와 소가씨와의 관계로 대표되는 바와 같이 당시의 지배층인 호족에 의해 건립된 것이며, 지금까지 고분의 조영에 투입되어 있던 이들의 부와 권력 많은 사람들이이 새로운 문화의 건설로 나뉘어진 것 같습니다.
아스카 사탑의 심초로부터 발견된 사리 용기 중, 고분의 부장품과 동종의 물건이 풍부하게 거두어져 있던 것은, 고분 문화와 아스카 문화와의 결합과, 또한 고분 문화로부터 아스카 문화에 의 전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스카 문화에 있어서의 불교는 이와 같이 조형 미술의 면에서, 일본 문화사 위에 일신 시기를 획하는 것이었지만, 사상사의 면에서도 새로운 동향의 눈에 띄고 있던 것을 보는 것이 해서는 안 된다.
이 시기의 불교는 호족들에 의해 오로지 현세 신앙을 위한 주술로서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것 같고, 그것이 후세까지 일본 불교의 기층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지만 그러한 일반적인 수준 을 깨는 사상의 이해도 전무하지 않았다.
성덕태자의 불교사상에 대해서는 학문적으로 확실한 사실로 어디까지 확인할 수 있는지 라는 말에 의해서도 현실의 부정과 그 위에 입각하는 고차 세계의 자각이라는 불교 철학의 핵심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 엿보고 후세의 높은 불교 사상 전개의 기점이 이미 여기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또한 불교문화뿐만 아니라 중국풍 정치도덕사상 및 법률제도의 이식도 이 시기에 시작되고 있다. 6세기 이후 백제로부터 오경박사가 공상되어 유교의 고전의 학습이 시작되고 있었다고 생각되지만, 거기서는 아마 문장의 독해의 정도에 머물고 있었을 것이다.
이에 반해 성덕태자의 사건으로 의심이 없는 것에 관위 12층의 제정이 있지만 그것은 유교의 덕목을 명칭으로 선택하여 관인의 순서를 정한 것이므로, 여기서는 분명히 유교 하지만 사상 특히 정치사상으로서 이해되어 이용된 것이 인정되는 것이다.
중국풍의 법률제도를 본뜬 정치질서를 만들어 내려고 하는 움직임은 다음 백봉기에는 말한 것이지만 그 선구가 되는 것을 이 시기에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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