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의 아버지는 걸걸중상이고, 어머니의 이름은 사서에 전하지 않는다. 대씨와 태씨 족보에 의하면 대조영의 어머니는 시씨라고 한다. 대한민국 역사학계에서는 대조영에 관한 다양한 견해가 표명되어 왔지만, 일반적으로 구당서에 나온 고려 별종으로 보아 고구려 장군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왜냐하면 신당서의 기록은 전반부는 발해국기, 후반부는 구당서에 의거해 서술된 것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그 외의 주장으로는 말갈족으로서, 고구려에 복속된 뒤, 고구려화 과정을 거친 말갈계 고구려인 또는 송화강 유역에 거주하던 고구려인라고 본다. 대조영이 수나라 개황 연간 돌지계가 이끌고 수나라로 귀부하여 유성에 정착하게 된 속말말갈의 후손으로 보아, 그의 출자에서 고구려를 배제하는 학설도 존재한다. 서울..
1894년 7월 27일 ~ 12월 17일까지 김홍집 내각을 중심으로 군국기무처 주도 하에 추진되었다. 김홍집 내각이 교정청을 폐지하고 설치한 군국기무처는 김홍집, 김가진. 김윤식 등 17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임시 합의기관으로, 행정제도, 교육, 사법, 사회 등 전근대적인 여러 문제에 걸친 사항과 정치 제도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군국기무처의 회의총재는 영의정 김홍집이 맡았다. 특히 '개국' 기원 연호를 사용하여 청과의 동등한 관계를 나타냈고, 중앙관제를 의정부와 궁내부로 구별하여 기존 조선의 '6조 체계'를 8아문인 내무, 외무군무, 탁지, 학무, 법무, 공무, 농상 등으로 개편하였으며, 이를 의정부 직속으로 두었다. 궁내부는 전과 달리 왕실 사무와 정부 사무를 분리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탁지아문은 재정을 ..
세종의 뒤를 이은 조선 제 5대 왕 문종은 자신의 단명을 예견하고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 우의정 김종서 등에게 자신의 사후, 어린 왕세자 이홍휘가 등극하였을 때 잘 보필할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다. 문종의 뒤를 이은 단종 이홍위는 즉위 당시 12세의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세종과 문종의 유명을 받은 고명대신 김종서가 조정의 인사권 및 병권과 정권을 쥐고 섭정을 하였다. 수렴청정을 통해 왕실의 중심점 역할을 해야 할 대왕대비와 대비가 부재한 상황에서, 세종의 영특한 아들들은 세종대에 각종 정치, 문화 사업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각자 만만치 않은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과 셋째 아들 안평대군의 세력이 가장 컸으며, 조정의 신료와 왕실, 심지어 환관, 나인까지도 이들의 ..
조선의 제 10대왕 연산군은 1476년 11월 23일 성종의 장자이자 계비인 폐비 윤씨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이융이다. 후궁이 많았던 부왕 성종은 폐비 윤씨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고, 윤씨가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것을 기회삼아 후궁들과 인수대비는 윤씨를 왕비에서 폐하고 궁궐에서 쫓아낸다. 1483년(성종 14년) 세자에 책봉되었고, 서거, 조지서, 허침, 서거정 등에게 학문을 배웠다. 성종에게는 정실 소생으로는 연산군 이외에 제 2계비인 정현왕후 소생 진성대군(중종)이 태어났으나 성종이 사망할 당시에는 세자 이융의 나이가 18세였으므로 대세를 피할 수 없었다. 연산군은 어려서 생모인 폐비 윤씨가 아닌 계모 정현왕후의 아들인 것처럼 성장하였다. 일설에는 이후 폐비 윤씨의 소생 연산군은 정현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