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오적은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에서 을사늑약의 체결을 찬성했던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외무대신 박제순의 다섯 명의 매국노를 일컫는 말이다. 당시 대신 중 수상격인 참정대신 한규설과 법부대신 이하영, 탁지부대신 김영기는 조약에 반대했고, 궁내부대신 김재극은 조약 체결과 직접 관계가 없었다. 조약이 체결되자 이에 반대했던 한규설은 일본의 압박으로 물러가고, 조약에 조인한 외부대신 박제순이 참정대신이 되었다. 이하영은 초기의 반대 의견을 곧 뒤집은 뒤 조약 체결 과정에서 박제순보다 더 강하게 활약을 하였으나 처음에 반대한 사실 때문에 을사오적에서는 빠졌다. 을사오적은 매국노의 대명사로 이후 수도없이 많은 암살의 위협에 시달렸다. 오기호, 나철이 ..
조선의 제 15대 왕이자 광해군 이휘는 1575년에 태어났으며 선조와 공빈 김씨의 서차남으로 위로는 친형 임해군 이진이 있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광해군에 봉해졌다. 어려서 생모 공빈 김씨를 여의고 부왕의 차가운 냉대 속에서 자랐다. 외할아버지인 김희철마저도 임진왜란 중에 전사하면서 그가 기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선조에게 적자가 없는 데다, 서장남인 임해군이 포악하고 인망이 없어 서차남이었던 광해군이 임진년 1592년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야사에 의하면, 선조가 아들들을 불러 '가장 맛있는 음식이 무엇이냐?'라고 물었고, 다른 왕자들은 각기 다른 대답을 하였지만, 광해군은 소금이라 대답하여 세자로 책봉되었다고 한다. 1591년(선조 24년) 종계변무가 성사되자 기뻐했던 부왕 선조는 왕자들도 특별히 광..
1873년 탄핵으로 인해 흥선대원군은 세력을 잃고 지위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점점 증가하는 서구 세력의 압박으로 백성들의 민심은 아직 쇄국에 머물러 있었고 흥선대원군 또한 최익현 등 척화파들과 계속 소통하면서 아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서계 문제가 확대되 다시금 척화파들이 여론을 등에 업으려던 순간, 운요호 사건으로인해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며 조선은 쇄국을 버리고 개국, 개화로 향하게 됐다. 흥선대원군을 중심으로 하는 척화파는 관직에서 밀려나고 투옥되는 등, 고종 부부 측의 척족을 중심으로 하는 수구파, 개화파가 정치 전면에 나섰다. 민씨 정권은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서양 열강과의 불평등 통상조약을 연이어 맺었는데, 이는 척화파는 물론 민심의 큰 반동을 불러일으켰다. 삼정의 문란 때문에 ..
고구려의 초대 국왕으로 이름은 주몽, 묘호는 태조이다. 동명성왕 또는 추모왕으로 불린다. 기원전 58년 출생하였으며 기원전 19년 서거하였다. 재위기간은 기원전 37년부터 기원전 19년으로 18년의 재위기간을 보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동명왕편'은 주몽의 탄생 설화를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현재 전해지는 주몽 설화는 고구려가 부여를 병합하여서 인지 부여의 시조인 동명왕의 설화와 고구려의 건국설화가 비슷함을 보인다. 역사학계에서는 부여의 동명왕과 고구려의 주몽을 다른 인물로 여긴다. 고주몽은 햇빛에 의한 회임이라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데 선비족을 통합한 단석괴도 햇빛에 의한 회임이라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는 해모수가 주몽의 아버지로 등장한다. 해모수의 '해'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