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메뉴 바로가기
연산군 이융

조선의 제 10대왕 연산군은 1476년 11월 23일 성종의 장자이자 계비인 폐비 윤씨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이융이다. 후궁이 많았던 부왕 성종은 폐비 윤씨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고, 윤씨가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것을 기회삼아 후궁들과 인수대비는 윤씨를 왕비에서 폐하고 궁궐에서 쫓아낸다. 1483년(성종 14년) 세자에 책봉되었고, 서거, 조지서, 허침, 서거정 등에게 학문을 배웠다. 성종에게는 정실 소생으로는 연산군 이외에 제 2계비인 정현왕후 소생 진성대군(중종)이 태어났으나 성종이 사망할 당시에는 세자 이융의 나이가 18세였으므로 대세를 피할 수 없었다. 연산군은 어려서 생모인 폐비 윤씨가 아닌 계모 정현왕후의 아들인 것처럼 성장하였다. 일설에는 이후 폐비 윤씨의 소생 연산군은 정현왕..

금융 2022. 11. 25. 17:45
을사오적 이완용, 이지용, 이근택, 박제순, 권중현

을사오적은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에서 을사늑약의 체결을 찬성했던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외무대신 박제순의 다섯 명의 매국노를 일컫는 말이다. 당시 대신 중 수상격인 참정대신 한규설과 법부대신 이하영, 탁지부대신 김영기는 조약에 반대했고, 궁내부대신 김재극은 조약 체결과 직접 관계가 없었다. 조약이 체결되자 이에 반대했던 한규설은 일본의 압박으로 물러가고, 조약에 조인한 외부대신 박제순이 참정대신이 되었다. 이하영은 초기의 반대 의견을 곧 뒤집은 뒤 조약 체결 과정에서 박제순보다 더 강하게 활약을 하였으나 처음에 반대한 사실 때문에 을사오적에서는 빠졌다. 을사오적은 매국노의 대명사로 이후 수도없이 많은 암살의 위협에 시달렸다. 오기호, 나철이 ..

금융 2022. 11. 24. 17:39
광해군 이휘

조선의 제 15대 왕이자 광해군 이휘는 1575년에 태어났으며 선조와 공빈 김씨의 서차남으로 위로는 친형 임해군 이진이 있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광해군에 봉해졌다. 어려서 생모 공빈 김씨를 여의고 부왕의 차가운 냉대 속에서 자랐다. 외할아버지인 김희철마저도 임진왜란 중에 전사하면서 그가 기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선조에게 적자가 없는 데다, 서장남인 임해군이 포악하고 인망이 없어 서차남이었던 광해군이 임진년 1592년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야사에 의하면, 선조가 아들들을 불러 '가장 맛있는 음식이 무엇이냐?'라고 물었고, 다른 왕자들은 각기 다른 대답을 하였지만, 광해군은 소금이라 대답하여 세자로 책봉되었다고 한다. 1591년(선조 24년) 종계변무가 성사되자 기뻐했던 부왕 선조는 왕자들도 특별히 광..

금융 2022. 11. 24. 12:32
임오군란

1873년 탄핵으로 인해 흥선대원군은 세력을 잃고 지위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점점 증가하는 서구 세력의 압박으로 백성들의 민심은 아직 쇄국에 머물러 있었고 흥선대원군 또한 최익현 등 척화파들과 계속 소통하면서 아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서계 문제가 확대되 다시금 척화파들이 여론을 등에 업으려던 순간, 운요호 사건으로인해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며 조선은 쇄국을 버리고 개국, 개화로 향하게 됐다. 흥선대원군을 중심으로 하는 척화파는 관직에서 밀려나고 투옥되는 등, 고종 부부 측의 척족을 중심으로 하는 수구파, 개화파가 정치 전면에 나섰다. 민씨 정권은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서양 열강과의 불평등 통상조약을 연이어 맺었는데, 이는 척화파는 물론 민심의 큰 반동을 불러일으켰다. 삼정의 문란 때문에 ..

금융 2022. 11. 24. 11:19
이전 1 ··· 3 4 5 6 7 8 9 다음
이전 다음

티스토리툴바

이메일: help@abaeksite.com | 운영자 : 아로스
제작 : 아로스
Copyrights © 2022 All Rights Reserved by (주)아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