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화백 회의 신라는 삼국중 귀족의 권력이 가장 강했던 나라였으며, 강한 귀족들의 권력이 가장 오래 지속되었다. 그로인해 신라의 귀족회의인 '화백 회의'는 가장 체계적이었고, 오래 지속되었다. 화백 회의에서는 고구려, 백제의 귀족 회의처럼 귀족들이 모여 나라의 중요했던 왕위 계승, 전쟁에 관련된, 불교 수용 등 을 결정했다. 화백 회의는 신라의 4개의 신성한 곳으로 여겨지는 우지산, 피전, 금강산, 청송산을 돌아가면서 회의를 진했하였다. 다른 나라와는 다르게 화백 회의는 귀족들의 의견이 반드시 만장일치가 되어야만 했다는 것이다. 어떤 안건에 대해 반대하는 귀족이 단 한명도 없이 모두가 찬성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굳이 이렇게 만장일치로 회의를 진행했던 이유는 화백 회의에 의한 결론에 좀 더 권위를 ..
골품제도는 신라 사회의 신분제이다. 혈통에 따라 신분에 일부 제한을 두었던 폐쇄적인 신분 제도로 신라가 고대국가로 발돋움한 이래 멸망할 때까지 약 1,000여 년간 신라 사회의 기본 패러다임이었으며, 고대 일본의 성씨제도에까지 영향을 끼쳤다는 가설도 있다. 골품제는 기본적으로 여덟 단계로 구분된다. 왕족은 성골과 진골로 두 가지로 구분되며, 왕족이 아닌 신분은 진골에서 6까지의 두품으로 나누었다. 숫자가 높은 두품이 더 높은 신분이다. 두품의 경우 왕경에 거주하는 귀족 계층에 대해서만 적용하였던 신분제로 보기도 한다. 성골 왕을 포함해서 왕위 계승권을 가지는 왕족으로 많이 폐쇄적이었고 그 규모도 몹시 작았다. 신라가 율령을 반포하고 고대 국가로 성장한 법흥왕 무렵에 성골이 성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진덕여왕..
신라 제 27대왕 선덕여왕에 대한 출생에 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삼국사기'에는 진평왕의 맏이로, '삼국유사'에는 형제자매 서열에 관한 기록이 없이 진평왕의 딸로만 기록되어있다. 진평왕이 아들 없이 승하하자, '화백회의'에서 진평왕의 왕녀인 덕만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여, "성스러운 조상의 혈통을 이어받은 여황제"라는 뜻을 가진 '성조황고'라는 존호를 올렸다. '삼국유사' 왕력 편은 “김씨 성골의 남자가 다하였으므로 여왕이 왕으로 선 것이다” 라고 사실을 알리고 있다. 즉위한 해인 632년(건복 49년)에 을찬 또는 을제로 하여금 국정을 총괄하게 하였고, 각지에 관리를 파견하여 홀아비, 홀어미, 고아, 독거노인 등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돕게 하였으며, 당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당 태종은 빨강, 자..
895년(진성여왕 9년), 궁예는 동해를 끼고 북상해 영서 지방으로 넘어와 저족, 성주, 철원, 금성, 부약 등 10여 군현을 점령하여 세력 기틀을 다졌고, 지금의 강원도 전 지역을 장악한 궁예는 이듬해 철원을 자신의 도읍으로 삼았다. 궁예의 세력이 급격히 성장하자 패서, 즉 예성강 이북 지역의 호족들이 차례로 궁예에게 앞다투어 투항하였는데, 세력이 강력해진 것을 본 궁예는 나라를 세워 왕이 된다. 896년(진성여왕 10년) 송악의 해상 호족이었던 사찬 왕륭이 송악군을 바치고 항복한다. 이에 궁예는 왕륭을 금성태수에 임명하고 한편 왕륭의 건의를 받아들여 왕륭의 아들인 왕건을 송악군에 발어참성을 쌓게 한 뒤 그곳의 성주로 임명한다. 그 뒤로도 세력을 쉬지않고 확장하는 한편 897년(진성여왕 11년) 왕륭의..